항목 ID | GC00500143 |
---|---|
한자 | 光山李氏 |
영어음역 | Gwangsan Yissi |
영어의미역 | Gwangsan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김정호 |
세거지 | 진도군 임회면 피동|진도군 의신면 중리|진도군 고군면 원포 |
---|---|
입향시기/연도 | 1590년 전후 |
성씨시조 | 이종금(李宗金) |
입향시조 | 이원섭(李元燮)|이원준(李元濬) |
[정의]
조선 중기 이후 진도에 세거해 온 성씨.
[연원]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6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이종금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의 40만 대군이 침략하였을 때 강감찬(姜邯贊)의 휘하로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을 굳게 지켰다. 그 공적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郡)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입향 경위]
광산이씨가 진도군에 많이 모여 사는 이유는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화란을 피해 진도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 속에서 정여립(鄭汝立)[1544~1589]의 모반을 조작해 동인(東人)들을 숙청했던 사건이다. 이때 동인계의 실권 배후인물이었던 광산이씨 이발(李潑)[1544~1589]과 그의 형제, 어머니, 아들 등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의 화를 피해 이발의 6촌 이윤[1573~?]의 아들 이근(李槿)[1602~1630]은 목포 달리도를 거쳐 이길(李洁)[1550~1589]의 아들 이원섭(李元燮)과 함께 진도군 고군면 원포로 들어왔고, 이발의 또 다른 6촌인 이원준(李元濬)은 진도군 의신면 중리에 자리를 잡았다.
[세거 현황]
진도군 임회면 피동에 자리를 잡은 광산이씨 집안의 일부 사람들은 용산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고군면 원포에 자리를 잡은 광산이씨 집안은 의신면 거룡과 읍내 동외리로 주거지를 확장했다. 의신면 중리로 들어온 이원준 후손들은 임회면 죽림, 읍내 남동, 지산면 삼당리, 임회면 팽목리, 지산면 사천리, 의신면 옥대 등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집안을 남외파라 한다.
이원섭의 집안은 동외파라 하는데 동외파 중 일부가 조도면 성남도를 거쳐 조도면에 퍼졌다.
[묘역]
2002년에 광산이씨 5백 위를 모신 경모사를 진도군 진도읍 남산리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