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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199
한자 回洞-瀛登祭
영어음역 Hoedong Maeul Yeongdeungje
영어의미역 Sacrificial Rite for Yeongdeung Goddess of Hoedong Village
이칭/별칭 회동마을 영등사리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지도보기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제의양식
의례시기/일시 기상대 의뢰
의례장소 뽕할머니 제각
신당/신체 뽕할머니
제관 기관장|지역유지

[정의]

매년 음력 3월 초 조수간만의 차로 회동마을모도 사이의 바다가 열릴 때 올리는 제의.

[개설]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에서는 진도군의 주도로 매년 ‘신비의 바닷길 축제’를 개최하면서, 축제의 일환으로 마을 공동제사로 행해졌던 제의 양식인 영등제를 지낸다. 영등제는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사당에서 뽕할머니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다.

[명칭유래]

한국의 농·어촌에서 일반적으로 봉사되는 풍신제를 영등제라고 하는데, 진도군 금계리 회동마을의 경우 역시 도서 해안지역의 일반적 영등제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등사리’라 불리던 것이 축제화되면서 영등제라 불리게 되었다.

[연원]

영등제의 주신은 뽕할머니로, 뽕할머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에 이 마을은 호랑이의 침입이 심해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마을 주민들은 뽕할머니만 마을에 남겨놓고 떼배를 타고 물 건너 모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혼자 남은 뽕할머니는 뿔치바위에서 날마다 가족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빌었다. 그러던 음력 2월 15일, 뽕할머니는 다음날 무지개를 타고 가족을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날이 새고 나니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서 바다가 무지개 모양으로 갈라졌다. 한편 모도로 피난 갔던 사람들 또한 식수 부족으로 곤란을 겪어 다시 호동마을로 돌아오려던 차에 바다가 무지개 모양으로 갈라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가 무서워 꽹과리를 치면서 돌아와 보니 바다가 갈라진 것은 하나님의 조화가 아니라 뽕할머니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뽕할머니는 사람들을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기진해서 죽었다. 뽕할머니는 죽어서 신령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인데, 마을사람들은 뽕할머니가 신령이 되었다고 해서 영등이라고 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회동(回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매년 뽕할머니를 위한 제를 모셔 그 이름을 영등제라 했다.

[절차]

회동마을에서 이루어졌던 전통적인 영등사리를 말할 때 제의 절차, 뿔치바위, 영등할머니, 치등, 치등의 난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이 영등사리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 중에서 치등과 치등에서 벌어지는 난장은 진도 회동의 영등사리가 다른 지역의 영등제와 다르다는 것을 구별짓게 하는 것이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비 총액은 나락 1가마 값 정도가 든다. 제비는 각 집마다 내며, 동네 유지들과 공을 들이려는 몇 집에서 더 많이 낸다. 중년에는 부락 기금으로 충당했다. 제수는 주과포와 돼지머리 하나다. 뽕할머니 제사에는 밥과 술과 주과포만 진설하고 용왕제에만 돼지머리를 진설한다.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은 부락 주민들이 함께 먹는다.

영등제를 지낸 다음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에는 음식을 차리고 메와 술만을 올리며 유교식 제례는 지내지 않는다. 이유는 유교에는 용왕제라는 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도 제관들은 메와 술을 올린다.

큰 굿을 할 경우 용왕제는 당골이 주관한다. 당골은 용왕제에서 무굿을 한다. 마을제와 갯제, 또는 용신제를 함께 지내는 사례는 전남의 도서·해안지역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도 마을제는 유교식으로, 갯제는 고사 지내는 방식으로 지내거나 당골이 주관한다.

제터인 뿔치바위는 마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노인들은 걸어가기에 힘든 험한 바위지대에 있는 약간 넓은 분지다.

치등은 존재 자체가 신비를 내포한다. 그리고 영등사리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신비를 느끼게 한다. 치등은 마을 옆 해변 제터인 뿔치바위와 모도를 잇는 육계도다. 원래 물 밑에 잠겨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영등사리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치등의 평상시 수심은 5m 정도고 물이 제일 많이 빠져도 2m를 유지한다. 그런데 영등사리 일곱물 때(오후 6시 30분쯤) 그 모습이 드러난다. 치등의 규모는 길이 2.8㎞, 폭 50m, 높이 1m 정도이다. 금호도와 모도 양 섬의 영향으로 조류가 치등을 향해 양쪽에서 밀려와 그 경계선에 흙과 모래, 기타 부유물을 퇴적시켜 치등을 만들었다.

치등(육계도)은 새벽 6시, 오후 6시 두 번 드러나는데, 이를 ‘물이 갈라진다’ 또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라고 표현한다. 치등이 드러나는 자연의 신비 현장에서 사람들은 난장을 벌인다. 물이 갈라지면 사람들은 치등에 들어가 맘껏 놀고 또 조개, 소라, 낙지, 미역, 톳, 청각 등을 채취하는 것이다.

회동 영등사리는 남부 의신면 5개 마을, 북부 고군면 6개 마을 청춘남녀들이 모여 논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굿과 구분된다. 마을사람들이 지내는 뽕할머니 제사와 용왕제가 끝나면 의신면고군면의 젊은이들이 뿔치바위에 모여든다. 의신면에서는 돈지, 옥대, 연주리, 초사리, 동치 등지에서 오고 고군면에서는 오일시, 오산, 지막, 향동, 모사, 벌포 등의 마을에서 온다.

물이 빠지는 석양 시간까지 100여 명의 젊은 남녀가 모인다. 모두 젊은이들인데, 회동까지의 거리도 멀고 제터인 뿔치바위로 들어는 길이 험하고 치등에 들어가 노는 것도 젊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만 모이는 굿판이 되었다. 제장에 모인 사람은 100여 명이지만 회동의 젊은이들은 20여 명 내외로 회동 사람들보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다.

회동은 의신면고군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이들이 모여 놀이하는 목에 해당된다. 영등사리 때 치등에 모여 놀면서 서로 대립하는데, 대립되는 세력은 의신면의 초사 들판 세력과 고군면의 향동 들판 세력, 그리고 의신면의 돈지 들판 세력과 고군면 오산·지막 들판 세력이다. 이들은 각기 규모가 비슷해서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식해 영등사리에서 맞선다.

물이 빠져 치등이 드러나면 남자들은 치등을 걸어다니면서 놀고, 여자들은 낙지·반지락·소라·미역·해삼 등을 잡는다. 젊은이들이 어울려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채취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뻘을 던지고 밀고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논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희롱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남자와 여자들이 벌이는 시비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 장면을 연애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들도 남녀 불문하고 밀치고 뒹구는 일이 벌어져 마을 사이의 싸움으로 변하는 사례도 있다. 돌아가는 길에 패를 지어 북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길놀이가 펼쳐진다.

[현황]

영등축제의 주신은 뽕할머니다. 전라남도 진도 사람들의 역사는 영등축제 주신인 뽕할머니의 생애와 일치한다. 전설이나 신화에 지역의 역사체험이 상징화되어 담겨 있다는 신화적 원리가 이 경우 들어맞는다. 신의 본풀이가 집단의 역사체험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그 신은 집단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정체성의 준거가 된다. 앞의 서술이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뽕할머니의 자손들, 즉 진도 사람들의 역사라면 1970년대 이후 회동의 역사, 또는 진도의 역사는 뽕할머니의 기도, 또는 신통력의 증거들이다. 따라서 뽕할머니는 영등축제의 신인 동시에 회동의 신이고 진도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의 제의에서 지역 축제로 확장된 경우이다. 군이 주관하는 영등제는 1976년부터 시작되어 2006년까지 29회째가 되었다. 처음에는 ‘영등살 놀이’로 불렀고 7회 때부터 ‘영등제’라고 불렀으며, 14회인 1991년부터 ‘영등축제’로 개칭했다. 그리고 현재인 2006년에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축제’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에는 영등살 놀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치루었으며 회동 주민들의 역할이 뚜렷했다. 축제의 내용은 뽕할머니 기원제, 용왕제, 영등살 놀이(진도만가, 진도들노래, 소포농악, 진도강강술래)로 진행되었다. 1980년 제3회 영등살 놀이의 경우 1일 행사로 양력 4월 16일 10시 30분부터 17시 30분까지 치루어졌는데 당시에는 용왕제, 뽕할머니 기원제, 만가, 들노래, 농악, 강강술래가 공연되었다. 초기의 영등살 놀이에서 회동 주민들은 뽕할머니 기원제와 용왕제의 제비를 군청으로부터 받았지만 제수를 준비하고 제관을 선정하고 제 지내는 일을 외부의 간섭 없이 수행했다.

하지만 10여 년 후인 1990년대에는 축제일이 3일로 확대되고 관광객의 수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 등의 보도 취재진도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다. 1998년 21회 영등축제는 전야제, 본행사(의식 및 영등살 놀이), 부대행사로 구성되어 3일 동안 치뤄졌다.

이상과 같이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점차 관을 중심으로 주도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회동마을 사람들이 영등제를 영등축제로 확장시킨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농업사회의 해체와 산업사회로의 전환 구도는 회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회동마을의 청년들만이 아니라 영등사리에 참여했던 많은 청년들이 일할 곳을 찾아 외지로 이주하는 사례가 잦아지자 당시의 마을 지도자들은 영등사리의 지속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영등사리의 위기는 곧 마을의 위기로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뿔치바위를 매개로 한 군과의 협상에서 뿔치바위의 훼손을 대가로 영등사리의 축제화를 지원받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영등할머니에 대해 상당히 확신에 찬 믿음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의 생각은 제터인 뿔치바위를 훼손시키더라도 영등제 자체만은 보존하려 했으며, 197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또 마을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했다. 새마을 운동의 과정에서 군에서 해안선 작업 도로를 내면서 영등제의 제터인 뿔치바위를 훼손시키려 하자 주민들을 동원하여 반대운동을 펼치는 한편 길을 내는 조건으로 군으로부터 영등제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주민들은 뿔치바위라는 신성공간을 훼손시키는 대신 군청이라는 세속적 힘을 마을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관의 지원을 받은 현대의 영등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영등축제 관련 업무를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전담하고 있다. 군이 영등제 활성화를 위해 주력한 부분은 정부의 관광진흥정책에 대응하는 일, 홍보하는 일, 연행 인력을 조직화하는 일, 시설을 확충하는 일 등이었다.

영등제 행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군청에서는 ‘진도군 영등축제행사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군청이 주도하여 조직했는데, 군청을 중심으로 군번영회와 문화원이 참여하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축제 본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군내의 각 공연단체, 문화 단체와 교섭하여 출연 교섭을 하고 또한 준비 상황을 점검한다. 한편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산 확보, 교통 대책, 관광객 안내, 홍보, 특산물 판매 대책 등을 세우고 실천한다.

축제 본행사는 뽕할머니 제사와 진도 민속 공연인데, 초기에는 각 단체들이 출연하여 공연했다. 용왕제와 뽕할머니 기원제는 회동마을 사람들이 담당했고 만가, 들노래, 농악, 강강술래는 각 전승단체에서 담당했다. 그리고 관광객이 회동에 접근하기 용이하도록 도로와 주차시설을 확충하고 공연장과 치등 주변을 정비하여 관광객이 관람하고 치등 현장에 불편 없이 들어갈 수 있도록 단장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영등할머니 제사, 용왕제, 치등에서의 난장이 어우러진 굿판이었다. 영등할머니 제사와 용왕제는 회동 주민들의 신성 제사이고, 치등에서의 난장은 주변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다. 힘있는 두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미약한 민촌 마을의 입장에서 마을의 정체성을 보장하고 번영을 보장하는 사회적·종교적 장치로 연행된 영등사리는 이제 영등축제라는 세계적 축제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회동 주민들과 진도 지역의 엘리트들, 그리고 군의 정성과 지혜, 자본이 투자되었다.

전라남도 진도의 역사와 진도 주민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는 회동과 뽕할머니의 신화를 소재로 한 영등축제는 진도의 문화상징이다. 굿이 지향하는 마을과 마을의 화해와 화합, 민중 고난의 해방, 신이한 이적을 통한 종교적 신성, 난장의 흥겨움 등이 진도의 전통문화를 통해 표현되고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른 어떤 축제보다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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