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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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음역 | Donghak Nongmin Undong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이칭/별칭 | 갑오농민전쟁,동학란,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명철 |
[정의]
1894년 반봉건·반침략의 기치 아래 일어난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개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 ‘보국안민 광제창생(輔國安民 廣濟蒼生)’을 기초로 천주교인 서학에 대칭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동학농민군이 궤멸되고 1905년 교도 손병희(孫秉熙)는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반제·반봉건·근대화운동으로 농민전쟁,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에는 동학의 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따라서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을 이용했지만, 동학운동은 단순한 종교활동이 아니라 국가보위와 농민구제를 이념화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개인의 내면 구제는 궁극적으로 사회구제를 동반하지 않을 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통분을 느낀 농민들이 전봉준 접주를 중심으로 고부군청을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조병갑은 파면되었으나, 새로 임명된 박원명(朴源明)과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는 민심수습보다는 동학교도 탄압에 보다 열중했다. 이에 분노한 전라북도의 동학접주들은 그해 4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창의할 것을 결의하고, 10개 고을에서 1만 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해 무장을 갖추면서 동학교도와 농민이 연합한 동학군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장 먼저 부안군을 접수한 동학군은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패퇴시키고 5월10일 정읍으로 진격했다. 관군이 해로를 통해 법성포에 도착하자 동학군은 전라남도 장성으로 후퇴해 4월 27일 황룡촌 싸움에서 또 다시 승리했다. 패주하는 관군을 쫒아 전주에 입성한 동학군은 6월 11일 24개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관군과 화약을 맺었다. 이 화약에 따라 동학군은 해산하고 그 대신 53개 주읍에 동학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그해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6월 23일에는 일본 수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대를 참패시키고 친일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투쟁을 선언하고 다시 무장군을 일으켰으나, 10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에 참패해 11월 12일 이후 후퇴를 거듭하다가 20여 일만에 해산했다. 12월 2일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역사적배경]
전라남도 진도에는 1892년 1월 나주사람 나치현이 의신면 도목리로 들어와 포교가 시작되었다. 1894년 4월 27일 동학군에 의해 전주감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진도부사 이희승은 종적을 감추었다. 보수적인 유생과 서리를 중심으로 치안유지를 위한 수성군이 결성되고, 초대수성장에 고군면 석현 출신 김익현을 추대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용기로 바꿨다.
[목적]
전주화약에 따라 진도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을 개혁하려는 목적.
[발단]
7월 들어 진도군 고군면 내동 출신 손행권 등 동학도들이 금갑만호진과 남도만호진을 급습, 병기고에서 조총·화약·삼지창·환도 등을 탈취해 읍내의 수성대와 싸움이 벌어졌다.
[경과]
이 무렵 진도집강 개설을 위해 조도 출신 박중진이 일단의 동학군(영광, 무장)을 이끌고 읍내 쉬미항으로 들어와 수성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구전에 의하면 이때 박중진은 수성군에 붙잡혀 죽고 그의 딸은 동외리 청년의 전리품이 되었다 한다.
8월 14일 진도부사로 윤석신이 부임했다. 9월 18일에는 진도감목관도 도착했다. 진도 동학도들은 진도를 벗어나 나주 동학도에 합류했으나 고막원에서 관군과 충돌, 나치현이 학살되고 김광윤·나봉익·양순달·하영재 등은 진도로 압송되었다. 10월 10일 진도감목관은 관노와 서리 등 1,322명을 모아 수성군을 조직하고 동학군의 준동에 대비했다.
12월 들어 공주전투에 참가했던 동학군이 패주하면서 장흥 이방언 접주 산하 동학군들은 12월 5일 장흥군을 접수하고 10일 병영성을 불태웠으나 15일의 읍내 석대전 전투에 일본군에 궤멸되었다. 이때 패잔 동학군들은 관산을 거쳐 섬으로 숨거나 강진 칠량만을 거쳐 완도와 진도의 조도 일대로 몸을 피했다.
[결과]
일본 토벌대는 해남읍내에 진주하여 동학 관련자들을 숙청하고 해남 우수영을 거쳐 12월 26일에 벽파진에 도착했다. 12월 27일 진도읍에 도착한 일본군과 관군은 수성군으로부터 감옥에 가둬둔 죄수들을 인계받았다. 죄인들을 문초하고 주민들과 대질해 50여 명을 철마광장(당시 읍장터)에서 총살하고 무혐의자는 석방했다. 이때 총살된 동학군은 손행권, 김윤선, 김대욱, 서기택 등이며, 이들은 송현재에 묻혔다.
동학은 갑오년의 시련을 겪은 뒤 쇠잔해진 뒤로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6년 진도에도 교주가 설치되어 진도종리원이라 하였다. 초대 교주장은 김상익, 2대는 김익태, 3대는 황응해였다. 광복 후까지는 진도에는 상투머리를 한 동학교도들이 더러 있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의 전국적인 사회개혁운동에 보조를 같이하며 진도집강소를 차리고자 전개되었던 진도군민의 동학농민전쟁 성격과 규모는 진도군의 향토사 연구를 위한 소중한 사료로서의 의의와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