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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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음역 | seonggwak |
영어의미역 | castle / citadel / castle walls |
이칭/별칭 | 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정성민 |
[정의]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돌로 구축한 방어시설의 총칭.
[개설]
성(城)과 성곽(城郭)은 엄밀하게는 다르다. 성(城)은 내성(內城)만을 의미하고 성곽(城郭)은 내·외성을 통칭한다.
성곽은 거주 주체에 의해 도성(都城)과 읍성(邑城)으로 나누어진다. 지형에 의해서는 평지성(平地城), 평산성(平山城), 산성(山城)으로 나누어진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는 국경성(國境城), 해안성(海岸城), 강안성(江岸城), 내륙성(內陸城)으로 나누어진다. 축성 재료에 따라서는 목책성(木柵城), 토성(土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토석성(土石城), 석성(石城), 전축성(塼築城)으로 나누어진다.
구조의 평면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성(方形城), 원형성(圓形城), 부정형성(不定形城), 장성(長城), 차단성(遮斷城)으로 나누어진다. 성의 중복도(重複度)에 따라서는 단곽(單郭), 중곽(中郭), 외성(外城), 나성(羅城)으로 나누어진다.
[현황]
진도의 성곽에는 진도읍성(珍島邑城), 철마산성(鐵馬山城), 망금산성(望金山城), 진도 용장성(珍島 龍藏城), 용장성(龍藏城), 고군성지(古郡城址), 첨찰산성지(尖察山城址), 금갑도진성지(金甲島鎭城址),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桃鎭城), 심동리성지(深洞里城址), 동구리성지(洞口里城址) 등이 있다.
1. 진도읍성(珍島邑城)
소재지는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이며, 축성법은 석축이다. 진도읍성은 대부분의 읍성류와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평산성으로 배후에 산성을 두고 있다.
본래 진도읍성은 서벽이 동벽보다 짧게 축성되었다. 현존하는 성벽으로는 군강공원 동편의 길이 60m의 동벽과 군강공원에서 진도중학교와 진도고등학교에 이르는 연장 길이 150m의 북벽, 진도중학교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는 약 50m의 서벽 및 옥천극장 앞 민가의 약 20m의 남벽 등이 남아 있다.
2. 철마산성(鐵馬山城)
소재지는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와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에 있는 철마산이며, 축성법은 석축이다. 철마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철마산은 대체로 동편과 북편은 암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편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성축은 산정을 둘러싼 테뫼형으로 대체로 남·서·북벽만을 축성하고 그 외 동북벽의 일부와 동벽은 자연적인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동북벽의 일부와 동벽쪽은 축성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여타의 축성 부분도 완전히 붕괴되어 원래의 축성 형태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도괴된 석축의 흔적으로 보아 협축법에 의해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평탄한 분지형의 산 정상에 위치한 철마산성의 총 둘레는 약 200m 규모이나 석축이 둘려진 부분은 약 100m 정도이다. 철마산성은 진도읍성의 배후 산지에 있으므로 진도읍성이 적에게 침탈되었을 때 피신하여 농성하는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 망금산성(望金山城)
망금산성은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망금산 정상 동북편 500m 지점에 있는 테뫼형 방형성(方形城)이다.
망금산성에 관한 전거(典據)는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주위가 대략 200간(間)의 토루(土壘)로 왕온(王溫)이 쌓았다.”고 조사·보고되어 있을 뿐이다. 그 후 『문화유적총람』에는 “고려시대 왕온이 축성하였다고 전하는 성으로 이때는 주위 약 360m의 토루였다.”라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철삭가설지(鐵索架設地)로부터 남방으로 800m 거리의 산정에 가로 300m, 세로 200m 정도의 토성을 쌓아서 작전에 임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민간인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주민들을 병사로 위장시키기 위하여 강강수월래를 하였다 하여 강강수월래터로 전해 오고 있다.
토성은 직사각형의 형태이고, 지금은 토성 위에 잡초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만 토성의 형태는 뚜렷이 남아 있다. 토성의 중앙 부분에는 “밥짓는 자리라 하여 가로 5m, 세로 5m, 높이 2m 규모의 웅덩이가 있다.”고 조사되어 있다.
4. 진도 용장성(珍島 龍藏城)
현재 진도군 군내면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진도 용장성은 총 연장 길이가 12.85㎞에 이른다. 성내 면적은 약 258만 평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방대한 규모이다.
진도 용장성의 동·북으로는 명량해협이 위치하고 북서쪽은 둔전제방(屯田堤防)이 축조되어 있어 현재는 둔전저수지와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만곡(彎曲)된 해안이었다. 대체로 서쪽과 남쪽은 여러 봉우리를 잇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진도 용장성은 주로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부분적으로 토성인 곳도 있다. 성벽은 대부분 삼별초의 몰락 이후 철거령에 의해 훼철되고 그 기저부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일부 성벽이 잔존하여 있는 곳은 높이 1.5m 내외이다.
성축은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고 석재는 비교적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일부 만곡된 해안에는 성벽을 쌓지 않은 곳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북쪽으로 뻗어 나간 성축은 유교마을 뒷산을 감싸 돌아 북쪽 해안의 만곡된 부분에서 일단락된다.
5. 용장성(龍藏城)
진도 용장성 내 행궁지와 행궁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 하록의 토축성을 말한다. 용장성은 1270년(원종 11) 삼별초에 의해 축조되어 대몽항쟁의 본거지로 이용했던 성이다.
용장성은 용장리 뒷산의 현 용장사 서남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물지는 남향하는 것이 통례이나 행궁지는 북향하고 있으며 지형 상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산자락이 감돌아 자연스럽게 은폐되어 있다.
원래 용장사지에 자리 잡은 행궁지는 남고북저(南高北低) 형의 배산인 남쪽의 협착한 계곡을 9단의 축대로 정지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이는 토벌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용장성을 쌓으면서 최단 기간 내에 궁궐의 조영을 서둘러야 했던 상황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고군성지(古郡城址)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 현 고성초등학교 주변에 소재한 방형의 석축성이다. 고군성지는 백제시대 초창되어 고려시대 용장평으로 옮기기 전까지 읍치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군성지는 백제성으로서는 드문 방형의 평지성이다.
고군성지가 소재한 고성리는 진도읍에서 해남 우수영을 잇는 80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석현에서 분기된 802번 지방도로 변에 위치한다. 남쪽은 첨찰산, 죽찰산 등 진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진도 용장성에 근접해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록을 따라 길고 좁다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동편은 해남 쪽으로 돌출한 원포리를 중심으로 안쪽으로 들어온 해안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원포리와 내산리 간에는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어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벌할 당시 홍다구가 이끄는 좌군의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7. 첨찰산성지(尖察山城址)
첨찰산성은 의신면과 고군면의 경계지인 진도군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해발 485m)의 정상 현 봉수대가 위치한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방의 해발 460m 고지와 남방 420m 고지를 연결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축의 길이는 1.5㎞에 달한다. 현재 완전 도괴된 성벽은 그 유구의 성격으로 보아 협축법에 의해 쌓은 석축성으로 판단된다. 석재는 30×50㎝ 크기의 판석형의 막돌을 사용하였고 갈대숲을 이룬 성내에는 현재도 여러 개의 절터와 와편 등이 산재해 있다.
왜 첨찰산 정상 꼭대기에다 1400~1500년 전 백제 인진도(因珍島) 때 긴 산성을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백제 당시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왜인들이 수시로 침범하고 남해안 일대를 괴롭혀서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 관방처(關防處)로서 막대한 인력을 투입하여 축성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8. 금갑도진성지(金甲島鎭城址)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뒷산(북편)의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석축성이다. 금갑도진성의 초축 연대는 1431년(세종 13) 전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축성 연대는 불분명하다.
고려 때에 설치된 남도진(南桃鎭) 하나만으로는 침범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에 힘이 모자랐을 것이다. 이에 남도진에 상응하고 우수영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으며 서남 해안 일대를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로서 금갑도에 진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1431년(세종 13)에 해남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금갑도에 진이 설치되고 수군만호가 주둔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갑리 뒷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성한 금갑도진성은 현재는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며 흔적만이 확인되는 북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잔존하는 유구로 보아 성축은 가로 90㎝, 세로 40㎝ 정도의 방형 및 장방형의 석재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맞추어 결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은 동남문지를 기억하고 있으나 현재는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다.
9.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桃鎭城)
고려 후기 왜구가 발호하자 1251년(고종 38) 남해안 일대의 경비와 방어의 필요상 천혜의 요새지인 남도포(南桃浦)에 남도진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338년(충정왕 2) 정월에 남도진에 처음으로 만호부가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현재의 남도성이 처음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도 남도진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이다. 현재 남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진성으로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구형(矩形)이다. 남동리는 서방 및 남방으로 돌출한 서망산 및 망대산 사이의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즉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곡면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은폐·엄폐되어 있으면서 진도 남도진성 남·서방의 서망산과 망대산은 적을 견제·감시하기에 좋은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10. 심동리성지(深洞里城址)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윗심동마을에서 세포마을로 넘어가는 속칭 ‘성재’에 위치한다. 심동리성지에 대한 전거(典據)나 조사 자료는 전무하다.
‘성재’는 북편 석적막산과 남편 급치산 사이의 801번 지방도로 상에 위치한다. 윗심동마을로부터는 북서방 약 1㎞지점으로 주위 산들은 대개 직립한 암산이다. ‘성재’를 넘어 서면 조도 해역과 접하고 동방 윗심동마을은 심동저수지와 인접해 있다. 현재 성축은 ‘성재’ 하록의 윗심동마을 김경호씨 소유지 밭둑에 위치한다.
도로에서는 약 30m 남쪽으로 도로와 평행하여 있다. 70×40㎝ 혹은 100×50㎝ 정도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구축한 성벽의 길이는 약 50m이고 높이 80~100㎝이다. 일부 성돌은 주위 논둑을 쌓는데 이용하고 주위에는 석재편이 산재한다. 그러나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는 토성이었다고 한다.
11. 동구리성지(洞口里城址)
동구리성지는 1708년(숙종 34)에 조도와 주변 5개 도서 지역에 진을 설치하는 상황이 보고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의 기록으로는『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구릉상에 있는 석루(石壘)로 주위가 약 272.7m인데 태반이 퇴락하였다”고 보고되고 있고,『문화유적총람』에는 “1707년(숙종 33)에 토성을 쌓고 일부는 석루로 270m 정도를 쌓은 성으로 현재 상태는 토성 일부가 잔존하고 있고 서해 수비의 요충지였으나 조선 말에 폐허되었다”라고 조사·보고되어 있다.
동구리는 좌·우와 후면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전면은 바다와 임해 있다. S자로 내만된 전방의 해안은 천연의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바다 쪽에서는 동구리 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구리성지는 이 동구리에서 율목으로 넘어가는 속칭 ‘성재’에서 산길을 따라 북편에 있는 ‘성재산’에 위치하고 있다. 즉 성이 소재한 성재산은 동구마을 뒷산과 율목마을 뒷산인 도리산의 중간에 위치한 성으로 테뫼형의 산성이다. 전체적인 산의 형세는 남급북완(南急北緩)으로 북편으로 저평한 경사를 이루다가 성축이 끝나는 부분(북벽)에서 급격한 단애를 이루고 있다.
성축은 7~8부 능선을 따라 테뫼형으로 축조하였는데 서·북벽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은 도괴 내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잔존하는 성축으로 보아 성은 내탁법에 의해 구축하였고, 일부는 암벽이나 바위 위에 보완·축성한 곳도 있다. 성벽은 판석형의 자연석으로 기저부를 축조한 다음 그 위에 작은 석재로 쌓아 올렸다.
현재 가장 양호한 서벽의 경우는 현재 높이 1.5~2m, 폭1~1.5m이다. 그 외 동·남벽은 도괴된 상태이다. 성의 총 연장 길이는 400~500m이다. 또한 남벽에 해당하는 성재산 정상에는 원형의 연대가 있었다 하나 현재는 파괴되어 잔형을 찾기 힘들다. 상조도에는 이 외에도 서편의 도리산과 동편의 윗모실 뒷산인 대붕산에 연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모두 인멸되어 현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