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61 |
---|---|
한자 | 李資謙-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영준 |
[정의]
고려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인주 이씨(仁州 李氏) 출신의 이자겸(李資謙)이 일으킨 난.
[개설]
이자연(李子淵)[1003~1061]의 손자이며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1126]이 1126년(인종 4)에 왕권의 약화를 틈타 왕위를 빼앗으려 했던 사건이다.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이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사실상 왕을 대신해 실권을 차지하자, 왕이 하급 신하들과 함께 이자겸 제거를 모의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1144]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왕은 척준경을 이용해 이자겸을 공격하여 이자겸의 왕위 찬탈 음모를 분쇄하게 된다. 이후 이자겸은 처와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靈光)으로 귀양 가고 다른 아들들도 각기 유배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의 문벌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고 왕권을 견제하고자 과거제, 전시과(田柴科)[고려 시대에 벼슬아치나 공신(功臣) 또는 각 관아에 토지 및 땔나무를 댈 임야를 나누어 주던 제도], 녹봉제 등을 정비하였다. 특히 그들은 과거 외에 음서(蔭敍)[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제도를 통해 가문의 지위를 높였으며, 사전(賜田)[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과 공음전(功蔭田)[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을 기반으로 토지의 개간이나 겸병(兼倂)[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합치어 가짐] 등으로 사전(私田)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키워갔다. 하지만 문벌 귀족들의 귀족적 특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과의 혼인 관계였다.
이렇게 혼인 관계를 통해 세력을 키운 집안 중에 인주 이씨는 대표적인 외척(外戚) 세력이었다. 인주 이씨는 이허겸(李許謙)의 딸이 안산 김씨(安山金氏) 김은부(金殷傅)의 아내가 되고, 김은부가 낳은 두 딸이 모두 현종(顯宗)의 왕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허겸의 손자 때에는 이자연의 고모인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의 손자가 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으로 이어졌으며,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왕비로 들어가면서 무려 문종 이후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인주 이씨는 이자의(李資義)[?~1095]가 헌종(獻宗)을 폐위시키고 한산후(漢山侯)를 추대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이자의의 종형제인 이자겸의 딸을 숙종(肅宗)의 아들인 예종(睿宗)이 왕비로 맞이하면서 다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리고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자 이자겸은 1122년 외손인 14살의 어린 나이의 태자 해(楷)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자겸은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이라는 호를 받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가 되어 확고한 세력기반을 다졌다.
어린 인종을 받들고 실권을 쥔 이자겸은 자기 세력권에서 벗어난 이는 백방으로 중상하고 제거했으며, 그의 족속을 요직에 배치하고 벼슬을 팔아 세력을 확대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자겸의 세력은 당시 병권을 배경으로 한 척준경 세력과 야합하였다.
이후 이자겸의 위세는 점차 높아져 국공에 봉해지고 부를 세워 숭덕부(崇德府)라 했으며, 궁을 의친궁(懿親宮)이라 부르게 하였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는 스스로를 국가의 정치를 왕이나 다름없이 맡는 직함이라는 뜻인 지군국사라 일컫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이자겸은 사실상 왕조 교체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경과]
이자겸이 이렇게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인종에게 지군국사의 조책(詔策)을 내리도록 강요하면서, 인종은 이자겸을 혐오하기 시작했고 결국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녹연 등이 최탁(崔卓), 오탁(吳卓), 권수(權秀) 등 장군들과 의논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먼저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 상서(兵部尙書)[고려 시대에 둔 병부(兵部)의 으뜸 벼슬] 척준신(拓俊臣)[?~1126]과 아들 내시 척순(拓純)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에 내던지면서 이자겸의 난이 도발되었다.
척준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척준경이 일이 급하므로 앉아서 기다릴 수만 없다고 하면서, 시랑(侍郞) 최식(崔湜) 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넘어가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지녹연, 최탁 등은 상대의 병력이 크게 집결한 것으로 오해하고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그저 활을 가지고 성문 위에서 지키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의장(義莊)이 현화사(玄化寺)의 승려 300명을 인솔하고 궁성 밖에 도착하였다. 이에 인종은 신봉문에 나와서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내탕(內帑)[왕실의 재물을 넣어 두던 창고]의 은폐(銀幣)를 나누어 주고는 무기를 버리도록 선유(宣諭)[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던 일]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활을 쏘면서 공격하였고, 이자겸은 주모자를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마침내 척준경 등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오탁·최탁 등 반대파의 주모자들을 죽이고, 지녹연·김찬 등을 유배시켰다.
이리하여 결국 인종과 지녹연, 김찬에 의해 벌어진 이자겸 제거 계획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신속한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산호정(山呼亭)·상춘정(賞春亭)·상화정(賞花亭) 등 세 정과 내제석원(內帝釋院)의 낭무(廊廡)[정전(正殿) 아래로 동서(東西)에 붙여 지은 건물] 일부만이 겨우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자겸은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의 서원에 인종을 연금하고 좌우에는 모두 자신의 일파를 앉혔다. 정사도 인종이 청단(聽斷)[송사(訟事)를 자세히 듣고 판단함]하지 못하게 하고 동작과 음식도 제한하였다. 이로써 이자겸과 척준경은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결국 인종은 척준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이자겸을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지난 일을 잊고 마음을 다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고,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은 신의가 없다며 충의로써 공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이 무렵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李之彦)의 노비는 척준경의 노비가 왕궁에 활을 쏘고 궁궐을 태운 죄를 비난하였다. 이 일이 척준경에게 알려지면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부일(金富佾)을 척준경의 집으로 보내어 거사를 재촉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인종은 이자겸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무장을 하고 연경궁(延慶宮)[고려 시대 궁궐의 하나로 국왕이 거처하며 집무를 보던 정궁(正宮)] 북쪽에서 침문(寢門)[침실로 드나드는 문]을 침범하려 하는 기미를 탐지하자 손수 밀지를 써서 환관 조의(趙毅)를 시켜 척준경에게 보내 거사를 재촉하였다. 그리고 척준경은 궁궐로 가 천복전(天福殿)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인종을 호위하고, 활을 쏘아대는 이자겸의 무리를 피해 나왔다. 인종은 군기감에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척준경은 승선(承宣) 강후현(康侯顯)[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밀직사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을 시켜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불러 팔관보(八關寶)[고려 시대에 팔관회(八關會)의 행사를 담당하던 관청]에 가두고, 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벤 뒤 그 밖의 무리들을 체포하였다.
[결과]
고려 인종에 의해 시도된 이자겸 제거 시도가 발단이 된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이 이자겸을 배신함으로써 끝났다. 이자겸의 난의 결과 이자겸 및 그의 처와 아들 이지윤은 영광으로 귀양 가고 다른 아들들도 각기 유배되었다. 또한 이자겸의 심복인 평장사(平章事) 박승중(朴昇中) 등 30여 명과 관사(官私)의 노비 90여 명도 각각 먼 곳에 유배되었다. 왕비가 되었던 이자겸의 딸들 역시 모두 폐위되었다. 그리고 공을 세운 척준경과 이수, 김향, 최사전은 각기 공신호(功臣號)[고려·조선 시대 공신들에게 주어진 명칭]와 높은 관작(官爵)[관직(官職)과 작위(爵位)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척준경은 그가 세운 공을 믿고 발호하다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의의와 평가]
이자겸의 난 은 고려 왕실 왕권의 미약함을 극도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건국한 지 200여 년 만에 왕실은 군국(君國)의 대권을 권신에게 빼앗기고 다른 성씨에 의해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자겸의 난 이후로 서경(西京)[고려 시대에 사경(四京) 가운데 지금의 평양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천도와 풍수설에 대한 왕실의 관심이 고조되었는데 이러한 미약한 왕실과 개경 귀족 간의 소원(疎遠)함과 그들 상호간의 분열은 새로운 정치 세력의 도전을 불러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