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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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壽期 |
이칭/별칭 | 순년(舜年)ㅣ곡구(谷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한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연일 정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순년(舜年), 호는 곡구(谷口)이다. 정시성(鄭始成)의 손자이자, 정인빈(鄭寅賓)의 아들이다. 아들로는 우의정을 역임한 정우량(鄭羽良)과 좌의정을 지낸 정휘량(鄭翬良)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정수기(鄭壽期)[1664~1752]는 1699년(숙종 25) 36세 되던 해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였으며, 1713년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용되었고, 사간원 정언을 거쳐 1716년 『홍문록(弘文錄)』[홍문관 관리 임명을 위한 제1차 인선 기록]에 올랐다. 1722년 사간원 정언으로서 경종(景宗)의 대리청정을 주청한 김춘택(金春澤) 등을 탄핵한 바 있는데, 이 때문에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주동 인물로 탄핵되어 강현(姜鋧)·이조(李肇) 등과 함께 삭탈관직 되었다. 1727년 대사간으로 복직된 후 승정원 승지·대사성·대사간·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1734년 개성 유수로 전보되었다가 1736년에 다시 대사헌으로 임용되어 지돈령부사·우참찬·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기로당상(耆老堂上)에 올랐다. 성격이 곧아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직언을 즐겨 하였다. 1752년 사망하였으며, 17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세기 후반 정제(鄭濟)가 인천 지역으로 내려온 이래 연일 정씨 일가는 대체로 인천 지역을 재지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 학동, 도곡 일대 및 청량산 부근은 정수기 일가가 기반으로 삼아 생활하던 곳이다.
[학문과 저술]
조태억(趙泰億)의 『계양수창첩(桂陽酬唱帖)』은 인천 지역을 재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조, 권첨(權詹), 정수기, 조태억이 부평에서 모여 수창한 시를 후일에 첩으로 제작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4년 겨울, 정수기가 당시 파직 상태이던 조태억에게 권첨과 함께 인천으로 와서 며칠간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얼마 뒤 조태억과 권첨, 정수기, 그리고 당시 정수기의 이웃에 살고 있던 이조 등은 부평에서 만나 나흘간 함께 지내며 수십 편의 시를 지었고, 후에 이것을 첩으로 제작하였다.
[묘소]
정수기의 묘소는 원우금면(遠又今面)[현재의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산 일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53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