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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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羽良 |
이칭/별칭 | 자휘(子翬)ㅣ학남(鶴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시성(鄭始成), 할아버지는 정인빈(鄭寅賓)이며, 판돈령부사 정수기(鄭壽期)의 아들로서 좌의정 정휘량(鄭翬良)의 형이다. 자녀로는 정원달(鄭遠達)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정우량(鄭羽良)[1692~1754]은 32세 때인 1723년(경종 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9위로 급제하였다. 1727(영조 3)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부수찬으로 시독관을 겸임하면서, 왕에게 주청하여 이황, 이이 등의 문집을 간행토록 하였다. 지평(持平)·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여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1740년 이조 참판 재임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 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우참찬을 역임하면서 한성부 서북인의 등용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였다고 전해지며, 개성(開城) 계성사비문(啓聖祠碑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우량의 아버지인 정수기는 인천 지역을 재지 기반으로 하여 활동한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아버지 정수기와 마찬가지로 정우량 또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 학동, 도곡 일대 및 청량산 부근을 기반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우량은 글씨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 북한 황해도 개성에 계성사비와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에 그가 지은 신도비가 남아 있다.
[묘소]
원우금면(遠又今面)[현재의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산 일대]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