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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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快述 |
영어공식명칭 | Yang Qwasu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5월 18일 - 양쾌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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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양쾌술 밀양 3·13 만세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양쾌술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태 90대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2월 27일 - 양쾌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8월 15일 - 양쾌술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1045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양쾌술(梁快述)[1896~1942]은 1896년 5월 18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양쾌술은 1919년 3월 13일 밀양 읍내에서 전개된 3·13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고종 인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여한 윤세주(尹世胄), 윤치형(尹致衡) 등은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인 전홍표(全鴻杓)를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보고하고 밀양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간 윤세주와 윤치형은 3월 11일과 12일 밀양면의 내이동(內二洞)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었다.
3월 13일은 밀양면 읍내 장날로, 정오 무렵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1시경 내일동(內一洞) 김병환(金鉼煥) 쌀가게 인근에 모인 윤세주 등은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병환 쌀가게 앞으로 간 양쾌술은 구한국 국기 1개를 건네받았다. 양쾌술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또한 김상득(金尙得), 박작지(朴作之) 등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이라는 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밀양면의 경찰, 헌병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양쾌술은 3월 14일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90대를 언도받았다. 양쾌술은 1942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양쾌술에게는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