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50
한자 密城孫氏
영어공식명칭 Milseong Sonssi|Milseong Son Clan
이칭/별칭 밀양손씨(密陽孫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태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세거|집성지 무연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단장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위양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초동리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초동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덕산리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덕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덕곡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상동면 -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가례리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봉황리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운정리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운정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교동 -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산외면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지도보기
성씨 시조 손순
입향 시조 손긍훈

[정의]

손순을 시조로 하고 손긍훈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거 성씨.

[연원]

밀성손씨(密城孫氏)밀양손씨(密陽孫氏)라고도 한다. 밀성손씨의 시조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孫)인 손순(孫順)이다. 손순은 신라 모량리(牟梁里)[현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출신으로 효행이 뛰어나 흥덕왕(興德王) 때 월성군(月城君)에 봉군되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손순매아(孫順埋兒)」 효행 설화가 있다.

손순의 장손 손익감(孫翼減)이 나라에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또 손순의 6세손 손긍훈(孫兢訓)은 밀양손씨의 중흥조이자 경상남도 밀양에 처음 적을 올린 입향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손긍훈은 밀양부 향리로서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고, 추화산 정상의 성황사 사신(祠神)으로 모셔졌으며,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에 있다. 광리군의 12세손 손빈(孫贇)은 고려 충렬왕 때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지낸 뒤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으며, 아들로 손광(孫洸)과 손원(孫沅)이 있다.

[입향 경위]

밀성손씨는 처음 입촌한 경상남도 밀양 시내를 비롯하여 손겸제(孫兼濟)가 이거한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동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죽동에 거주하는 밀성손씨는 주로 손광의 4남 손영의 후예이다. 밀양시의 다른 곳에도 밀성손씨 집성촌이 있는데, 예컨대 손수국(孫壽國)이 죽원에서 이사한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가 대표적이다. 또 손탁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문적 소실로 선대 계통이 미비한 손태좌(孫台佐)가 정주한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정주하였다. 증손 손충보(孫忠輔)는 임진왜란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서 영산 길곡(吉谷)[현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으로 이사하였고, 손충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이 몇 대를 살다가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德谷里)로 돌아왔다. 또 손시도의 7세손 손수(孫洙)는 삼랑진 금음물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임천리]에 살았다. 손경검(孫敬儉)의 증손자 손몽길(孫夢吉)은 임진왜란 때 출생지 사포리 송악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을 떠나 영산 도천리[현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로 이사하였는데, 손경검의 6세손 손명일(孫命一)이 1725년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로 복귀하여 터전을 새로 일구었다.

[인물]

밀성손씨의 근현대 인물로 33인의 민족 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한 손병희(孫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문산 손정현(孫貞鉉)은 1900년 밀양 개창학교[밀양초등학교의 전신]를 창설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손정현과 동서 사이로 독립지사인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출신의 손호(孫滸)밀양시 상동면 가곡리 출신의 손봉현(孫鳳鉉)이 있다. 손봉현은 일찍이 운영하던 한약방을 접고 1923년 북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한 뒤 김좌진 장군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을 모으던 중 1928년 체포되어 193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쳤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갔다가 1941년 귀향하여 의술을 베풀다가 타계하였고,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호밀양시 산내면 서기로 근무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가담한 뒤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교사이자 항일 투사인 손정도(孫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쳤다.

손일민(孫一民)은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손원일(孫元一)은 우리나라 초대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배 한 척 없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해군을 일으켰으며,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손기정(孫基禎)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었다.

아울러 19대 부산직할시장과 국토통일원장관을 지낸 손재식(孫在植)과 전 밀양문화원장이자 서예가인 손기현(孫琪鉉)이 죽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출신이고, 2022년 현재 밀양문화원장인 손정태(孫正泰)는 후지당(後知堂) 손인갑(孫仁甲)의 후예로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출신이다.

[현황]

밀성손씨는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5만 8369가구 24만 3473명, 2000년에는 8만 5333가구 27만 4665명, 2015년에는 30만 6895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밀성손씨와 관련된 사적으로 밀양시 교동 춘복춘복재(春福齋)·현충사(顯忠祠)·손긍훈 신도비, 밀양시 교동 모례오연정(鼇淵亭), 밀양시 삼문동 밀양초등학교의 손정현 기념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동죽원재사(竹院齋舍)·죽포정사(竹圃精舍),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의 칠탄정(七灘亭)·칠탄서원 유허비,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정문창녕장씨[손기후의 처] 정려각,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양송정 대춘의 만취재(晩翠齋)·독립의사 손호 사적비, 밀양시 부북면 덕곡리상덕재(尙德齋)·덕곡재(德谷齋),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황대의 밀성군 손빈(孫贇) 신도비·재숙소 봉림재(鳳林齋)·1419년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선략장군 손유호(孫攸好)의 묘와 묘비가 있다.

이 밖의 사적으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에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쌍절각은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아치실에서 출생한 의병장 후지당 손인갑, 후조당 손의갑 형제와 손인갑의 아들 손햑해(孫若海)의 정려이다. 손인갑, 손의갑 형제는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의령의 정암진 전투에서 순국하였고 손약해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다가 전사한 바, 1609년 충신·효자 정려를 받아 곽재우 장군의 보덕각(報德閣)과 나란히 쌍절각이 세워졌다. 원래는 후손들의 거주지였던 경상남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웠으나 1943년 전적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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