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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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谷書院 |
영어음역 | Bonggok Seow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1087-3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성격 |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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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12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1087-35 |
문화재 지정번호 | 논산시 향토유적 제15호 |
문화재 지정일 | 1992년 10월 28일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사원.
[개설]
봉곡서원은 이계맹(李繼孟), 이순인(李純仁), 남명한(南溟瀚), 진극효(陳克孝), 남두건(南斗建)을 제향한 곳으로, 우암 송시열과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위치]
논산시에서 전주 방향으로 국도 1호선을 타고 약 12.48㎞를 가면 논산시 연무읍이 나온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약 2.94㎞를 가다 보면 고내리가 나온다. 봉곡서원은 고내리 효죽골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봉곡서원은 1712년(숙종38)에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건립되었다. 『봉곡서원지』에는 송시열과 이호민이 봉곡서원의 건립을 발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건립 당시에는 봉곡서원이 아닌 봉곡향현사(鳳谷鄕賢祠)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언제부터 서원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시열과 이호민의 생몰년을 고려해 볼 때 1712년이 봉곡서원의 건립이 아닌 중건 시기 혹은 서원으로의 승격 시기일 가능성도 있으며, 송시열과 이호민의 건립 발의 또한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로 추정된다. 봉곡서원이 건립되던 당시 장항리[노루목, 현 연무읍 마전리]는 여산에 속한 곳이었으나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 논산시에 편입되었다. 1827년(순조 27) 청액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고,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그러다 28년 뒤인 1899년(고종 36)에 이르러 복설 허가를 받았는데, 이에 따라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봉곡 단소(鳳谷壇所)라 하였다. 이때 복건을 추진하는 측에서 기호사림의 대표격이었던 돈암 서원에 통문을 발하여 도움을 청했다.
봉곡서원의 건립이 송시열에 의해 발의된 것으로 보아 봉곡서원의 성향은 기호계임을 알 수 있으며, 복설을 추진할 때 가장 먼저 돈암 서원에 통문을 보낸 것은 기호 사림의 대표격인 돈암 서원의 도움을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돈암 서원은 즉시 관찰사에게 복설을 요청하고 필요한 경비의 조달을 청원하였다. 또한 관찰사뿐만 아니라 여산의 군수에게도 비슷한 글을 보내었다.
봉곡서원 복건의 추진 세력은 단순히 문중, 또는 향촌이 아닌 지방관까지 동원된 강력한 그룹으로, 여산 지역 유림 주도 하에 여산 군수 윤기진(尹起晋)과 정읍군수 윤익병(尹益炳) 등이 주무(主務)가 되었으며, 유사는 서병희(徐丙熙)가 맡았다. 그 외에 인근 지역의 유림들과 제향인의 후손들이 협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복건은 실패하였다. 복건 시도가 무산된 이후 건립의 주도 세력은 원내에 이계맹 등 5인의 비를 세우고, 옛터에 봉곡단(鳳谷壇)을 설립하여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1954년에 이르러서야 연무 지역의 유림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무읍 고내리 효죽동에 새 원우를 건립하여 이전하였다. 후에 1969년 내삼문, 1973년 숭모재와 외삼문을 세웠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인 사우와 동재인 숭모재의 규모는 39.67㎡이고, 서재이자 원직사(院直舍)로 보이는 도강재(道講齋)가 있다. 그 외에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다.
[현황]
1992년 10월 28일 논산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