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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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學 |
영어의미역 | The Study of Ritual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예의 본질과 의의 및 시비를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개설]
오늘날 충청 지역은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러한 상징의 연원을 따져보면 조선시대 가장 오랜 기간 정권을 잡았던 기호학파의 존재가 드러나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논산 지역에 뿌리내린 호서사림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전기 경기 지역의 사림에 종속되어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으로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은 그 이론적 분열에 따라 퇴계 학맥의 영남학파와 율곡 학맥의 기호학파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성리학은 특히 도통의 정통성을 강조하여 정통 학맥의 연속성을 중시해 왔는데 기호학파에서는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 외줄기로 이어가는 학통을 형성하였다. 원래 기호학파의 핵심인 이이와 성혼 등은 주로 서울과 경기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율곡의 적통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면서 충청도 연산(현 논산)이 그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호서예학]
이황과 율곡의 도학 체계 속에서는 성리학에 못지않게 예학의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성리학이 유교 규범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는 것이라면 예학은 그 행동 양식인 의례를 규정하는 것이므로 생활 규범으로서 더욱 일반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서민 대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지간으로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유학 사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17세기 전반에 예학의 학풍을 일으켜 17세기 후반 예학 논쟁인 예송(禮訟)의 선하를 열어 주었다.
김장생은 호서예학의 거두로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을 저술하여 한국적 예학을 확립하였으며, 그 흐름은 김집 등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난으로 여러 차례의 국난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하였는데, 정부와 학계에서는 예학을 심화시키고 예를 생활화시켜 사회 혼란을 안정화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의례를 중시한 영남예학과는 달리, 호서예학은 주자의 가례를 중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상 논쟁]
김장생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으며, 김집의 학문은 송준길, 유계, 이유태, 윤선거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송시열은 당시 서인의 영수로서 남인인 윤휴(尹鑴)와 격렬하게 대립하여 예송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학맥은 이단하를 거쳐 김원행, 권상하, 한원진 등에게로 이어졌다.
예송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과 얽혀 권력 투쟁의 구실로서도 작용하였지만, 예송의 본래 정신은 실제의 의례에서 그 원리에 관한 논쟁이요, 의리론적인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 송준길로 계승되는 학맥의 5명 모두가 잇달아 문묘에 배향되는 유례없는 사실은 이 학맥이 조선 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숙종 때에 이르러 기호학파는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다. 소론 측에서 송시열의 주자학 중심의 사상에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 1680년(숙종 6)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 박세채 등의 소론이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살았고, 소론의 영수인 윤증이 니산(현 논산시 은성면)에 살았다고 하여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도 불렀다.
그 후에도 사상적 논쟁은 계속되는데 송시열을 잇는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1727)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차이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인성과 물성이 다름을 주장한 권상하와 한원진 등이 호서에 산다하여 호론이라고 하였고, 인성과 물성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 이간의 의견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낙론이라 불렀다. 후일 호론은 대체로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위정척사 계열로 이어졌고, 낙론은 북학파, 개화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