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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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賢童 |
영어음역 | Yi Hyeondong |
이칭/별칭 | 농맹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순영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충곡서원에 제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농맹아(聾盲啞). 증조부는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이며, 아버지는 백파도정(白波都正) 이상(李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이현동은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왕손의 몸일지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의 문인으로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과 도의(道義) 교분이 두터웠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 인품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겼을 때 탄식하고 울면서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간할 수 없고,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 라고 하고 스스로 농맹아라는 호를 짓고 흥인문 밖에 퇴거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화를 입고 단종이 사사되니 이현동의 눈에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이현동은 서울의 소요를 피하여 연산 조령(鳥嶺)에 은퇴하여 살며, 평생을 북쪽으로 향해 앉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벼슬하지 말도록 경계했다.
[상훈과 추모]
남효온(南孝溫)과 원호(元昊)가 경탄해 이르기를 환공(桓公)과 장왕(莊王)이 집안으로 백이·숙제의 절개가 있다 하였고, 홍직필(洪直弼)은 행실을 닦아서 이름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이이는 이현동의 숨은 절개가 살았을 때나 매 한가지니 내가 공경하고 사모한다 하였다. 이현동은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