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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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亨孫墓碣 |
영어의미역 | Grave Monument of Yi Hyeongs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청동골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현정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청동골에 있는 조선 중기 이형손의 비석.
[개설]
신도비(神道碑)는 조선시대 임금이나 2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사람의 무덤 앞이나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묘갈(墓碣)은 신도비와 비슷하지만, 3품 이하 관리의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으로 신도비에 비해 그 체제와 규모가 작은 것이 특징이다.
이형손은 1418년 첨지중추원사 이다림(李多林)의 아들로 태어나 1436년(세종 1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판관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고, 연산군(連山君)으로 봉해졌다가 그해 가을 가평군으로 개봉되었다. 1492년(성종 23) 오위도총부부총관·내금위장·훈련원도정을 겸하여 역임하였다.
[건립경위]
이형손 묘갈은 그의 사후 1496년(연산군 2)에 건립된 묘갈과 1496년 세운 묘갈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자 1793년(정조 17)경 후손들이 새로 중수하여 세운 묘갈 등 총 2기가 있다.
[위치]
연산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600m를 가면 연산중학교가 나온다. 연산중학교의 전면에 국도 1호선이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쪽으로 350m 거리에 신도로와 국도 1호선이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이곳의 남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 위에 북서향으로 이형손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형태]
구비는 호패형으로 되어 있으나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비신의 높이는 144㎝, 폭은 57㎝, 두께는 25㎝이다. 신비는 지붕[옥개]수형 이수가 올려져 있다. 화강암 재질로, 비신의 높이는 156㎝, 폭은 64㎝, 두께는 23㎝이다.
[금석문]
이형손 묘갈은 김일손(金馹孫)이 찬하였으며, 구비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신비는 김상경(金相庚)이 썼다. 신비의 내용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새겨 넣은 것이다. 신비의 전면에는 ‘정충출기적개공신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함길도진무사가평군평호공이공지묘정부인단양우씨지묘(精忠出氣敵愾功臣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兼五衛都摠府副摠管咸吉道都鎭撫使嘉平君平湖公李公之墓貞夫人丹陽禹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후면의 음기에서는 ‘유명조선국적개공신가평군이공묘갈명병서(有明朝鮮國敵愾功臣嘉平君李公墓碣銘幷序)’로 시작하여 이형손의 가계와 행적, 역임하였던 관직들과 이형손 개인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끝에는 숭정삼계축삼월(崇禎三癸丑三月)에 중수하며 다시 세운 것임이 밝혀져 있다.
[현황]
1496년에 세운 묘갈은 현재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고, 1793년경 세운 묘갈도 마모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이형손 묘갈은 구비와 신비가 한 곳에 같이 세워져 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른 묘갈의 변화 형태와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또한 찬자(撰者)인 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어 사화를 입은 사관이다. 이형손 묘갈은 김일손이 남긴 유일한 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김일손의 문학적 부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