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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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Yun Jeung's Old House with a Long Time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노성산성길 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왕기 |
[개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 윤증이 살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윤증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의 입지 형태는 노성면 교촌리 남쪽으로, 개잣들이 펼쳐지고 들 가운데로 노성천이 흘러 지나간다. 북편으로 약한 구릉이 솟아 니산(尼山)이 되고, 니산 자락이 주택의 배면을 형성하고 있다. 니산 자락이 남으로 흘러 마을의 계면부를 형성하면서 서쪽에 노성향교를, 동쪽에 고택을 점지하였다. 고택의 동편으로 작은 구릉을 넘어가면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궐리사(闕里祠)가 자리 잡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정려각을 비롯하여 노성향교 등 조선시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 고택이 처음 문화재로 지정될 때 명칭은 '윤증선생고택'이었으나 명재 윤증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이 반영되어 2007년 1월 29일, '논산명재고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논산명재고택의 건립]
논산명재고택은 윤증의 말년인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이다. 후일 건물을 보수하면서 일부 세부 기법 등이 조선 후기의 것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건축적 특징으로 볼 때는 18세기 후반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조선시대 후반이 되면 건축 기법이 점점 세련되면서 도구가 발달하여 장식성이 가미되기 시작한다. 논산명재고택이 건립될 무렵은 건축 기술에 장식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지만, 아직 화려한 장식보다는 전 시대에 비해 점차 세련되어가는 초기단계라 할 수 있다. 이 주택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건축 기법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산명재고택의 형태와 배치]
논산명재고택은 약한 구릉지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에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안채, 후면 동쪽에 사당을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튼口자형 양반 주택이다. 주택은 크게 사랑채·안채·문간채·사당·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의 전체적인 배치 형상을 볼 때 사랑채가 중심축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사랑채 서편에 문간채가 이어져 안채 앞을 가로막으며 배치되었다. 사랑채 주변에는 담을 두지 않아 가옥 전체가 개방된 분위기다. 사랑채는 2단으로 조성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배치하였다. 사랑채 평면을 보면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3면에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서쪽의 마룻바닥을 높이 들어올려 하부에 아궁이 함실을 두고 있다. 극히 장식을 억제하면서도 세련된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서편에 붙어 있는 문간채를 지나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자 형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튼口자 집이 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익랑채를 연결하였다. 이 집에서는 안채의 대청이 다른 집에 비해 특히 크다. 조선시대 양반 주택을 보면 안채의 규모가 사랑채에 비해 대체적으로 큰데, 이는 안채가 집안살림을 꾸려 나가는 곳이라 다양한 기능을 담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채 서쪽 익랑에는 안방을 가운데 두고, 윗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서익랑의 평면은 전후로 툇간을 두고, 툇마루를 설치해두었다. 동익랑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평면은 안마당 쪽으로 전퇴를 두어 마루를 깔아 안대청과 연결시키고 있다.
동서 익랑채 부엌 상부는 모두 누다락을 설치해두었다. 이처럼 누다락을 설치해두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지형조건상 구릉지에 배치할 경우 후면에 배치된 안채가 사랑채에 비해 높아지는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단차가 나는 곳에 부엌을 두게 된다. 따라서 부엌 천정이 높아지면 내부공간을 처리하기가 어려우므로 부엌 천정 상부를 다락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안채의 다양한 살림살이 기능 때문에 저장공간이 요구된다. 따라서 부엌 상부공간을 다락으로 꾸밀 경우 훌륭한 저장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산명재고택에서 사랑채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보면 동편에 치우쳐 있지만, 진입과정에서 보이는 입면에서는 그리 치우쳐 보이지 않는다. 즉, 서쪽의 부속공간과 그 건물의 측면이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좌우 대칭적인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이 또한 균제된 입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정면의 칸수는 짝수인 4칸으로 계획하여 정면 길이와 높이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비례를 조정하였다.
만약 정면의 칸수를 3칸이나 5칸으로 만들 경우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비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몸채는 좌우를 비대칭으로 만들어 엄격함을 순화시킨 배려도 나타나고 있다. 고택의 정면에는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동양에서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주택의 전체적인 배치는 남측 전면에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두고, 약한 구릉에는 크게 4단의 축대를 설치하여 축단에 맞춰 남측 전면을 향하도록 건물을 배치했다. 제일 하단은 사랑마당을 두고 마당 한쪽에 우물을 설치해두었다. 이 우물은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사랑마당 동쪽에는 근래 만든 파고라가 있고, 파고라 동쪽에 또한 근래 만든 찻집이 자리 잡고 있다. 우물의 서쪽으로 박석을 깔아 안채의 중문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만들어두었다.
두 번째 단에는 사랑채가 동쪽으로 치우쳐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가 정면 중앙에 오지 않고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은 남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음양과 오행의 고대사상에 접목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여성들이 생활하는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서쪽에 배치되었다. 사랑채 서쪽은 동서로 길게 빈 공간을 두고 있다.
세 번째 단에는 안채가 가운데 마당을 두고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사당이 있고, 서쪽에는 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안마당에는 아무런 시설이나 조형물을 설치하지 않고 비워두었다. 안마당은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상부에 천막을 치거나 하여 작업공간으로 사용하는 유용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네 번째 단은 후원이 된다. 후원에는 장독대와 화계를 두고 이어 담장을 둘러 외부공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논산명재고택 내 건물 현황]
논산명재고택 내 각 건물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의 사랑방을 두고 동쪽에 대청, 서쪽에는 높은 누마루와 사랑부엌을 두었다. 사랑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 대청마루와 이어지도록 했다. 마루의 형태는 장귀틀과 동귀틀을 하인방 사이에 끼우고 장귀틀 사이에 마루장을 하나씩 끼워 만든 우물마루이다. 서쪽 높은 누마루 후면에는 중문간과 연결된 온돌방 2칸을 두고, 누마루 아래는 아궁이 함실을 설치해두었다.
기단은 막돌 바른층쌓기를 2단으로 하였는데 하단은 5단, 상단은 3단으로 쌓았다. 초석은 화강석을 방추형으로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크기는 아래·위가 서로 다른데, 아래는 7치(21㎝) 각이고 위는 6치(18㎝) 각이다. 기둥 상부에서는 장여를 끼우고 그 위에 도리를 올려 대들보와 결구하였다. 대들보와 기둥이 끼워지는 부분은 기둥 상부를 네 갈래로 파낸 다음, 횡으로는 장여와 도리를 끼우고 종으로는 대들보를 끼워두었다. 이러한 맞춤을 사개맞춤이라고 한다.
사랑방과 전면 벽 하단과 서쪽 누마루에는 목재로 높이 약 1자 반 정도의 머름을 설치하고 문을 달았다. 머름은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 없는 한국의 전통건축에만 설치하는 구조이다. 머름은 온돌의 발달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 목조주택은 대부분 온돌을 설치했는데, 온돌은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그 열기가 방바닥을 지나가면서 바닥을 데우는 복사난방이다. 그러므로 난방을 위한 열기는 바닥으로부터 올라오게 된다. 바닥의 열기가 바람으로 인해 식으면 난방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출입문 하부에 1자(30㎝) 또는 1자 반(45㎝) 정도로 턱을 만들어 문을 열더라도 방바닥의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였다. 이 시설이 머름이다.
대청마루의 천정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정을 했다. 연등천정은 서까래 구조를 그대로 보이게 하고, 서까래 사이는 흙을 발라 마감하는 방법이다. 연등천정은 별도로 천정재료를 쓰지 않고 구조체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장식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청마루를 제외하고 사랑방 천정에는 반자를 설치한 다음 종이를 발라 마감하였다. 사랑채의 지붕틀 구조는 1고주 5량집이다. 즉 높은 기둥을 중간에 하나 세우고 전후로는 낮은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보를 거는 방식이다.
보를 걸 때는 높은 기둥을 중심으로 후면에는 대들보를, 전면에는 퇴보를 올린다. 그 다음 종보를 올리는데, 종보를 올리기 위해서는 높은 고주에 맞춰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하나 세우고 그 위에 종보를 올려놓는다. 그 다음 종보 가운데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걸면 비스듬히 서까래를 올릴 수 있도록 경사각이 만들어진다. 지붕틀 구조에서 집의 규모가 커지면 도리 수가 많아지고, 집의 규모가 작으면 도리 수가 작아진다. 일반적으로 주택에서는 사당이나 창고의 경우 도리 수가 작은 3량집 구조로 하지만, 사랑채나 안채의 경우 5량집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논산명재고택에서도 사랑채와 안채는 5량집 구조로 하였다. 창호는 온돌방에는 주로 세살문이나 용자살문을 겹문으로 하고 대청마루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안채는 가운데 3칸을 안대청마루로 하고 좌우에 마루방과 온돌방을 배치해두었다. 안대청 동쪽에는 전면에서부터 부엌·건넌방·마루방·온돌방이 배치되고, 안대청 서쪽에는 전면에서부터 부엌·안방·윗방이 나란히 이어진다. 윗방과 안대청 사이에는 작은 고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 서쪽에는 작은 툇마루를 두어 후원과 이어지게 만들었다. 안대청 정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고 후면에만 3칸 모두 골판문으로 만든 분합문을 달아두었다.
기단은 자연석을 대충 장방형으로 다듬어 3단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다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단면은 아래위가 같은 6치 반(19.5㎝) 크기이다. 기둥 상부는 장여와 납도리를 보와 함께 사개맞춤으로 끼우고, 그 위에 서까래를 걸었다. 각 부재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장여는 2.5×5치(7.5×15㎝)이고, 처마도리와 중도리는 모두 같은 6×7치(18×21㎝) 크기이다. 반면 양 익랑채의 처마도리와 중도리는 5.5×6치(16.5×18㎝)이고, 종도리는 안대청과 같은 6×7치(18×21㎝) 크기이다.
지붕틀 구조는 2가지 형태를 하고 있는데, 안대청 부분은 고주가 없는 무고주 5량집 구조인데 비해 양 익랑 부분은 1고주 5량집 구조이다. 안대청 대들보 위 양쪽에 하나씩 장여를 받치고 그 위에 중보를 올린 다음, 중보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서까래를 걸도록 하였다. 양 익랑에는 판대공을 세우지 않고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치도록 했다. 각 보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대들보는 둥글게 깎아 만든 것으로 직경이 1자 4치(약 42㎝)이고, 종보는 모를 굴린 모둥근 각재로 6×7치(18×21㎝) 크기이다.
안대청 천정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정이고 나머지 다른 방들은 반자 위에 종이를 발라 마감하였다. 부엌 상부에는 누다락을 설치해두었다. 안채의 창호 문양은 크게 4종류가 사용되었다. 온돌방에는 세살문과 맹장지를 주로 사용하고, 안대청에는 골판문, 부엌에는 장판문을 달아두었다.
[논산명재고택의 의미]
논산명재고택의 특징은 호서 지방의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당을 생략하고, 대신 사랑채 공간을 조금 크게 하여 별당 기능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입면구조는 팔작으로 처리하여 안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가 안채와 가깝게 붙어 있고, 행랑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입면구조를 아름답게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보면 사랑채를 별도로 떨어진 듯 처리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떨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심축선은 이 두 건물을 비켜가고 각 건물의 세부는 비대칭으로 처리하여 상황조건에 충실하려는 주기론적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건축공간의 배치에는 시대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조선조의 유가사상은 주택공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면에서 후면으로의 종방향, 좌(동)에서 우(서)로의 횡방향에 따라 각 공간의 위계성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계획을 실현하게된 배경에는 오행·음양사상과 같이 옛날부터 내려온 고대 동양사상, 당시 조선시대 사회사상·풍수사상, 그리고 대지의 여러 가지 조건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택 앞에는 연못과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택 인근에 연못을 두는 것은 논산명재고택 외에도 윤황 고택, 사계 김장생의 고택인 은농재에도 남아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송준길 고택, 송시열 고택 등에도 있었다. 따라서 주택 인근에 연못을 두는 것은 충청도 지방 사대부 주택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 지방에 남아 있는 양반 주택으로서 여유 있는 배치구조, 넓은 안마당, 사랑채와 안채의 높이 차이를 적게 만드는 등의 지역적 특징이 주택의 배치와 구성에 잘 드러나 있고, 특히 조선 후기 기호학맥을 잇는 성리학자의 생각이 주택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