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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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御射臺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산3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도남 |
건립 시기/일시 | 1792년 - 어사대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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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78년 11월 10일 - 어사대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어사대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어사대비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산33-2 N37° 47′ 09.5213″, E127° 01′ 45.7574″ |
성격 | 사적비 |
양식 | 귀부 원수형 |
관련 인물 | 정조(正祖)|이민채(李敏采)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6㎝[높이]|55㎝[너비]|24㎝[두께] |
소유자 | 양주시 |
관리자 | 양주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적비.
[건립 경위]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양주 관아(楊洲官衙)에 행차하여 활을 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792년(정조 16)에 세운 사적비이다. 1792년 9월 정조가 광릉(光陵)[세조의 능]에 행차할 때 폭우로 다리가 무너져 동쪽 길을 버리고 북쪽 길을 택하였는데, 행차 후 돌아오는 길에 양주 관아에서 3일간 민정을 살피고 사대(射臺)에서 활을 쏜 후 잔치를 베풀었다. 어사대비(御射臺碑)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양주목사였던 이민채(李敏采)가 세운 것이다.
[위치]
어사대비는 양주시 유양동 양주 관아지(楊洲官衙址)[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1842]에 의하면, 과학당(跨學堂)[매학당 이전에 있었던 건물] 옛 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
비는 형태만 겨우 갖춘 거북받침 위로 비신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이다. 규모는 비석 너비가 55㎝, 두께가 24㎝, 높이가 136㎝, 총 높이가 186㎝이다.
[금석문]
비석 전면에 굵고 활달한 필체로 ‘어사대(御射臺)’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정조가 활을 쏘았던 내용에 이어 왕이 지은 시와 궁궐로 돌아간 후 왕이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두고 찬양하며, 이 비와 읍지(邑誌)에도 그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숭정 세 번째 임자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어 비석이 세워진 연대가 1792년임을 알 수 있다.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현황]
1978년 11월 10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양주시이다. 현재 맞배지붕을 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최근 어사대비 옆에 활을 쏠 수 있는 사대가 마련되었으며, 비각 보수 작업이 완료되어 깔끔하게 보인다.
[의의와 평가]
어사대비는 조선 시대 양주에 행차한 정조의 모습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며, 조선 시대 양주목(楊州牧)의 위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역사적 명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