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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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於屯洞 寺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어둔동 195전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주상호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9년 - 어둔동 절터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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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어둔동 절터 - 경기도 양주시 어둔동 195전 |
출토 유물 소장처 | 불교문화재연구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
성격 | 절터 |
[정의]
경기도 양주시 어둔동에 있는 고려 전기의 절터.
[변천]
어둔동 절터의 창건 연대나 폐사에 관한 문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석조물과 산포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창건되어 조선 중·후기경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어둔동 절터는 양주시 어둔동 어둔리 저수지 북쪽 ‘미륵골’에 있는 단천공동묘지 일대에 위치한다. 어둔리 저수지를 남동쪽으로 두고 형성된 ‘저수지마을’에서 동북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약 500m 정도 진입하면 단천공동묘지가 나온다.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은 단천공동묘지 앞 계단식 논[양주시 어둔동 193번지] 북쪽에 인접해 있는 구덩이와 남쪽 논, 북쪽 및 동서쪽으로 형성된 묘역 일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9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논과 접해 있는 구덩이에서 9기의 석조물이 확인되었고, 구덩이의 북쪽 묘역과 구덩이 사이에 난 농로에 많은 양의 기와와 토기가 산재해 있으므로 구덩이를 중심으로 한 사방이 모두 절의 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구덩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어 절의 구역 남쪽 범위를 우물이 있는 곳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우물은 과거 묘지가 들어서기 전 부근에 있었던 절에서도 사용하였었다고 한다.
논과 접해 있는 구덩이에는 석조 불좌상 1구, 석조 불입상편 3구, 석조 불상 두부편 1구와 연화 대좌 1기, 석등 화사석(火舍石) 1기, 장대석 1기, 방형 초석 1기 등 총 9기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1977년 조사에서는 석조 불입상 1구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으나, 1988년 조사에서는 이외에도 석조 불좌상과 팔각 연화 대좌, 팔각 석등 화사석, 방형 초석 2기, 원형 비신(碑身) 1기, 당간 지주 1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2007년 조사에서는 이외에 북서쪽에 위치한 묘지의 축대에서 원형 초석 1기를 더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전의 조사에서 보고된 원형 비신과 당간 지주, 원형 초석은 확인되지 않는다.
석조물은 총 9기로 길이 3m 정도의 구덩이에서 확인되었다. 석조 불좌상[광배 높이 106㎝, 광배 너비 93㎝, 현존 불신 높이 68㎝, 불신 최대 너비 76㎝, 어깨 너비 44㎝]은 광배 안에 불좌상이 한 돌로 조각된 것으로 머리와 광배 상부가 결실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U’ 자형으로 가금 앞을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왼손은 배 앞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왼손에는 알 수 없는 지물이 들려 있다. 고려 전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불입상1[현존 높이 256㎝, 몸체 너비 63㎝, 어깨 너비 52㎝, 두께 35㎝, 목 상부 구멍 지름 9㎝]은 구덩이의 동북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화강암을 납작하게 다듬어 조각한 것으로 두부가 결실되었고, 목 상부에는 두부를 끼워 넣는 구멍이 있다. 통견의 법의에 두 손을 모아서 깍지 낀 손목을 가슴에 얹은 형태의 수인(手印)이다. 고려 전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불입상2[현존 높이 138㎝, 몸체 너비 133㎝, 어깨 너비 121㎝]는 두부가 결실되어 상체만 남아 있다.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 상부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통견의 법의로 두 손을 덮고 있어 정확한 수인을 알 수 없다. 몸체 하부의 파손된 면에는 양쪽으로 지름 11.5㎝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하체를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전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불입상3[현존 높이 130㎝, 몸체 너비 124.5㎝, 두께 32.5㎝]은 하체만 남아 있는데,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서는 석조 불입상2와 연결되는 하체부로 추정하였다. 방형으로 치석된 화강암 판석에 옷 주름만 표현되어 있는데, 몸체 좌우로 흘러내린 옷 주름은 석조 불입상2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옷 주름의 표현과 상·하체를 연결할 수 있는 구멍이 있는 점, 몸체 너비가 비슷한 점 등으로 보아 석조 불입상2의 하체일 가능성이 높다.
석조 불상 두부편[현존 길이 101㎝, 너비 59㎝, 두께 39㎝]은 구덩이의 동쪽 언덕 위에 눕혀져 있는데 8조각으로 파손되어 있다. 얼굴은 긴 타원형의 형태인데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상호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긴 눈썹 선의 윤곽만 확인된다.
연화 대좌[전체 높이 25㎝, 전체 길이 80㎝, 상단 괴임 길이 48㎝, 하단 괴임 길이 57㎝]는 구덩이 안쪽에 매몰되어 있어 일부만 확인된다. 평면은 육각이며 상부에 2단 괴임이 치석되어 있고, 측면에는 복엽 연화문이 서로 엇갈리게 조각되어 있다. 석등이나 불상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 화사석[잔존 너비 31.5㎝, 화창 너비 8.5㎝]은 석조 불좌상 아래쪽에 매몰되어 있어 일부만 확인된다. 마멸이 심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각형으로 추정되며, 현재 2곳에 화창이 확인된다.
장대석[현존 길이 188㎝, 너비 57㎝, 두께 31㎝]은 석조 불입상3의 뒤쪽에 서 있고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마멸이 전체적으로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방형 초석[초반 길이 50㎝, 전체 높이 20㎝, 주좌 높이 8.5㎝, 주좌 하부 길이 32㎝, 주좌 상부 길이 25.4㎝]은 석조 불입상3의 왼쪽 아래에 있는데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이외에 별다른 유구가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은 구덩이와 묘역 사이에 난 농로에 많은 양의 기와편과 자기편, 토기편이 산재해 있다. 기와편은 통일 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종선문과 사선문, 무단식 수키와 등과 고려 전기에서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격자문, 어골문, 어골 복합문, 복합문 등의 기와편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회청색 경질 토기편과 백자 저부편이 확인된다.
[현황]
현재 어둔동 절터가 위치한 곳은 단천공동묘지 일대로 변해 있어 사역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북쪽과 동서쪽은 북동쪽 능선부 끝에 남아 있는 참나무류 군락을 제외하고는 모두 묘역으로 변해 있지만, 논과 접해 있는 구덩이에 석조물 9기가 남아 있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논과 접해 있는 지름 3m, 깊이 1.5m 정도의 구덩이에 석불 좌상 1구, 석불 3구, 불두 1기, 사각 주초 1매, 석등 하대석 1대, 석등 화사석 1매, 장대석 1매 등이 남아 있다. 주변에 기와편 등이 산재하고 있다.
석조물은 거의 방치 수준으로 구덩이 속에 매몰되어 있어 긴급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구덩이는 논과 접해 있어 내부가 항상 습한 상태이며, 벼를 재배하면서 발생하는 오염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공동묘지가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이 오고 가기 때문에 도난의 위험도 높다. 석조물 앞에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는데 부식되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