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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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世忠臣-師表-朴堤上 |
영어의미역 | Paragon of Future Faithful Retainer, Bak Jes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백승충 |
[개설]
박제상(朴堤上)은 4세기 말 5세기 초반에 활동한 신라 사람으로, 신라의 변경 지대인 양산 지방의 관리(혹은 세력가)로 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왜·백제로부터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왕자 두 명을 고구려와 왜에 각각 인질로 보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두 아우를 구하고자 하는 눌지마립간의 명을 받들어 박제상은 목숨을 걸고 적국에 들어가서 두 왕자를 생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박제상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했다. 회유하는 왜왕을 향해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가 되고 싶지는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고 싶지 않다.”고 일갈하였다. 박제상은 충의를 먼저 하고 자신을 뒤로 여기며, 지절을 소중히 하고 그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장부였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박제상을 충신의 사표로 삼아 그 충절을 본받아 기리고 있는 것이다. 박제상 이야말로 양산이 낳은 전례 없는 충절이라 할 수 있다.
[양산이 배출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언제 출생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41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19대 눌지마립간 때의 인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내물마립간 때부터 실성마립간을 거쳐 눌지마립간 때까지 활동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갈문왕인 아도, 아버지는 파진찬인 물품, 관등은 내마, 벼슬은 삽량주간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종래의 통설대로 박제상은 경주에 기반을 둔 진골 출신이며 지금의 양산인 삽량주에 관리로 파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손인 박제상이 활동한 시기가 주로 제19대 눌지마립간 때인 만큼 세대 차이가 워낙 크고,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을 김제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기록상의 혼란이 크다. 이에 박제상이 처음부터 삽량에 근거를 둔 토호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후 절충적 견해가 등장하였는데, 본래는 경주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으나 뒤에 삽량주로 이주 혹은 사민(徙民)이 되어 토호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제상 출자와 관련한 이와 같은 혼란은 자료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박제상이 활동한 지역이 바로 오늘날의 양산인 ‘ 삽량(揷梁) ’이라는 점이다. 즉 박제상은 양산이 배출한 신라의 충신으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신라의 고뇌와 박제상의 등용]
박제상이 활동하던 때인 내물마립간·실성마립간·눌지마립간 시대에 신라는 고구려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내물마립간 때 고구려 고국원왕의 남진 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366년 백제와 화친을 맺었으나, 373년 백제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망명한 사건을 계기로 백제와는 멀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가 신라에 접근하였다. 고구려는 377년과 381년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게끔 주선하는 등 신라를 백제로부터 떼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계속되는 고구려의 백제 공격과 광개토왕의 등장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력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어쩔 수 없이 392년 내물마립간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야 했고, 고구려 우위의 불평등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광개토왕 릉비에 의하면, 백제와 이미 ‘화통(和通)’하고 있던 왜(倭)가 399년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이듬해인 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고구려 도움으로 누란(累卵)의 위기를 극복하였기 때문에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는 ‘신라토내당주’가 상징하듯, 고구려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다. 실성마립간과 눌지마립간의 즉위에까지 고구려가 개입하고 있는 것은 그 간섭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간섭과 왜의 계속되는 침공에 직면한 신라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402년 왜와 ‘통호(通好)’하기 위하여 내물마립간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파견하였고, 10년 뒤인 412년에는 미사흔의 형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파견하였다. 모두 실성마립간 치세에 이루어진 일로, 당시 신라는 왕자 둘을 고구려와 왜에 각각 인질로 파견해야 했을 만큼 대외관계에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실성마립간의 뒤를 이어 눌지마립간이 즉위하였다.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그리고 내물마립간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눌지마립간은 무엇보다 인질로 가 있는 왕의 동생들을 귀환시켜야 했다. 눌지마립간은 수주촌간(水酒村干)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一利村干)구리내(仇里迺), 이이촌간(利伊村干)파로(波老)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눌지마립간은 그들을 불러 물었다.
“나의 동생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라서 그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다. 제발 살아서 돌아오게 해야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눌지마립간의 질문에 세 사람은 똑같이 “신들은 삽량주간 박제상이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면서 박제상을 천거하였다. 눌지마립간은 박제상을 불러 볼모로 잡혀있는 두 동생을 구출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박제상은 “신이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박제상은 먼저 사신의 예를 갖추어 고구려로 갔고, 장수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복호와 함께 귀국하였다. 눌지마립간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내가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 단지 한 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며 왜에 인질로 있는 동생 마시흔을 걱정하였다.
박제상은 “신은 비록 열등한 재목이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임금이므로 신이 한 마디의 말로 깨우치게 할 수 있었지만, 왜인의 경우는 입과 혀로 달랠 수는 없으니 마땅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청컨대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왜로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한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栗浦)[지금의 울산]에 도착하여 왜로 향하는 배를 띄웠다. 그 소식을 들은 아내가 포구로 달려와서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대성통곡하면서 “잘 다녀오시오.”하였다. 박제상이 돌아다보며 “내가 명을 받아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다시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고는 왜국으로 갔다. 왜국에서 박제상은 신라를 배반하고 망명한 사람처럼 행동하였으나 왜왕은 의심하였다.
당시 백제인으로 왜에 가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왜를 침략하려 한다고 왜왕에게 참소하였다. 왜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를 순회, 정찰케 하였다. 마침 그때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포로로 잡아 죽이자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믿게 되었다. 또한 신라에서 박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박제상이 신라를 모반하고 왜로 도망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왜왕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고 향도(嚮導)로 삼아 해중(海中) 산도(山島)에 이르렀다. 왜의 장수들은 신라를 멸망한 후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오자고 은밀하게 의논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박제상은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하였다. 왜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박제상에게 딴 마음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몰래 신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미사흔이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떻게 혼자서 돌아가겠습니까?” 하자, 박제상은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박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다음날 박제상은 늦게 일어나는 것처럼 꾸몄는데, 미사흔이 멀리 갈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의아하게 여긴 왜인들이 “장군은 어찌 이처럼 늦게 일어납니까?” 라고 묻자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박제상이 방에서 나왔다. 그때서야 왜인들은 미사흔이 도망친 것을 알았다. 왜인들은 박제상을 결박하였고, 배를 달려미사흔을 추격하였으나 안개가 자욱하여 추격에 실패하였다.
신라의 미사흔 왕자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왜왕은 노발대발하였고, 박제상은 체포되었다. 왜왕은 “너는 어째서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고 물었다. 박제상은 “저는 신라의 신하요, 왜국의 신하는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려 한 것뿐입니다. 어찌 왕에게 말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왜왕은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신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모두 쓸 것이요,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후한 녹으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가 되고 싶지는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작록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왜왕은 매우 노하였다.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에 걸어가게 하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박제상은 “신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달군 쇠 위에 세워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 박제상은 거듭 “신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란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그리움에 치술신모가 된 열녀, 박제상 부인]
눌지마립간은 박제상이 왜국에서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박제상을 대아찬에 추증하였으며, 박제상의 아내를 책봉하여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고 그 가족에게 후한 물품을 내려 박제상의 공을 기렸다. 또한 미사흔으로 하여금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박제상의 부인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남편을 사모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였다.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바다 건너 왜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다가 죽으니 그 몸이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었다. 부인은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