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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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岡書院址 |
영어의미역 | Site of Namgang Private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주남동 613[주남마을1길 8] 답(畓)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영옥 |
성격 |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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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808년 7월 |
정면칸수 | 측면칸수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주남동 613[주남마을1길 8] 답(畓)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주남동에 있는 이겸수를 제향하던 서원 터.
[개설]
학성이씨(鶴城李氏) 서면파 이겸수(李謙受)의 자는 자우(子虞), 호는 잠와(潛窩)이며, 수사(水使) 이종실(李宗實)의 5세손이요, 이종실의 여섯째 아들인 서면파 파조(派祖) 이직강(李直剛)의 후손이다. 1594년(선조 27)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치고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내자, 그 진위를 살피기 위해 장희춘(蔣希春)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고 적진에 파견되었다.
이겸수는 가등청정이 총애하는 왜의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접근하여, 적절한 논변과 거동으로 적의 불필요한 의심을 해소하는 한편, 충심으로 적진의 동태를 살펴 화친의 진위를 가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정주판관(定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판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겸수의 활동은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 고언백(高彦伯)의 명을 받아가등청정의 병영에 들어가는 기록을 포함하여 『선조실록』에 총 12건의 기사로 남아 있다. 1986년 간행한 『양산군지』와 2004년 증보된 『양산시지』에도 수록되었으며,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에도 그려져 있다.
[변천]
남강서원은 1808년(순조 8) 7월 이겸수를 제향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학성(鶴城)에 건립된 사우(祠宇)다. 학성은 경상남도 울산시의 옛 이름이다. 울산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동래부 울산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울산의 외남면·웅상면이 양산군으로 이관되었다.
남강서원이 위치한 곳의 주소는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였으나, 2007년 4월 1일자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양산시 주남동 613번지[주남마을1길 8] 답(畓)으로 바뀌었다. 남강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이때 사원(祠院)에 관련된 문헌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1946년 건물마저 망실되어 지금은 유허지만 남아 있다.
[형태]
남강서원은 조선 후기의 서원 건축 양식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 건물이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현황]
남강서원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이겸수가 사용한 장검이 문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남강서원의 유허지는 현재 일부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일반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겸수의 후손인 이기문에 의하면, 문중에서 남강서원을 복원할 계획을 세워 2008년 안으로 착공할 것이라고 한다. 건립 장소는 남강서원 옛 터가 아니라, 잠와공(潛窩公) 후손의 묘소가 있는 양산시 평산동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남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사(義士)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울산과 양산 지역을 충절의 고장으로 빛내주는 중요한 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