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892 |
---|---|
한자 | 花濟里 |
영어음역 | Hwaje-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미애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화제리 외화(外花)마을 입구에는 약 1,000평 정도의 소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이 형상이 마치 매화의 수꽃 형상을 하고, 맞은편의 명언(明彦)마을 뒤편 연화봉은 매화의 암꽃 형상을 하고 있어, 이 두 형상의 중간에 소하천이 흐르는 지형을 꽃으로 형상화하여 사람이 꽃을 건넌다는 뜻으로 ‘화제(花濟)’라 하였다고 한다.
화제의 한자어가 ‘화제(花濟)’가 아니라 ‘화제(火濟)’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화제리에서 구전되는 지명 중 쇄편·갓골·불무골·다갈점·쇄꼬지골·도장골 등 무기와 불을 나타내는 지명이 많은 데서 근거하고 있다. 쇄편은 쇠의 조각, 불무골은 불의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의 변천 용어라고 본다. 쇄꼬지골은 화살촉·창·말발굽 등 무기의 도구나 연장을 만들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철의 원산지가 옛 물금광산이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화제는 ‘불[火]을 다루던 곳’을 말하며 가야에서 원동면 지역을 보면 ‘건너다 보이는[濟] 곳’이기 때문에 ‘화제(火濟)’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양산읍지초』(1878)에 “화자포교(火者浦橋), 즉 금화저교(今花渚橋)”라는 표현이 이와 같은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형성 및 변천]
화제리에 언제부터 인구가 유입되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문서는 없지만, 1980년대까지 고인돌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에 인간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산물과 도덕골 사이 능선밭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상당수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지만, 마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모두 소멸되었다.
1786년에는 양산군 서면 화제리로 편성되었다가, 1789년 외화촌(外花村)과 내화촌(內花村)으로 양분되었다. 이후 양산군 하서면[원동면]의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라동·내화동·외화동·명언동 일부를 병합하여 화제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36년 이후 원동면 소속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8년 현재 외화마을·내화마을·지나마을·명언마을·토교마을 등 5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자연환경]
화제리는 오봉산을 사이에 두고 물급읍과 경계한 마을로서 토곡산 자락에 위치하여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앞으로는 내포천이 흐른다. 밭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 마을로는 화제·감태봉[감토봉]·골마을·내화·대바각단[죽전]·도덕골·명언·새마(신촌)·서편·수사물·안독점이·중리·지나리·화정 등이 있다. 감태봉마을은 감태봉 밑에 있는 마을이며, 골마을은 명언마을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대바각단은 대밭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수사물은 내화, 외화 중에 으뜸 되는 마을이다.
[현황]
화제리에는 2011년 8월 31일 현재 총 450가구에 965명(남 485명, 여 48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양산시의 대표적인 미곡 생산지인 화제들은 수해 상습 지구로서 1979년 160여 정보에 현대적 농지 개량 사업(농업용수 개발 사업)을 완료하여 넓은 들판이 되었다. 현재는 양산 지역에서 가장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으며, 양산신도시가 형성될 때 화제 지역의 농산물(미곡·축산물·채소 등)이 활발히 유통될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다. 과거에는 목화산지로도 유명하였으나, 현재는 주로 미곡을 생산하는 벼 주산지로서 친환경 농업 지구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낙동강을 유람하다가 이곳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천하제일의 거울을 대함과 같다 하여 ‘임경대(臨鏡臺)’라는 세 글자를 바위에 새긴 뒤 화제 일대를 유람하면서 화제팔경시(花濟八景詩)를 남기기도 했다. 매년 음력 1월 15일에 외화마을·내화마을·지나마을·명언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낸다. 양산 화제리 도요지는 11세기 무렵의 고려시대 녹청자 가마 터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195호이다. 화제리 지역 교육의 요람인 화제초등학교는 공립초등학교로 1936년 개교하여 1944년 화제공립학교로 인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