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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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環碧亭題詠 |
영어의미역 | Attaches a Subject, Poem Recite in Hwanbyeokjeong Pavil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성진 |
성격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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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안종설|윤필은|안행탁|안병원 |
창작연도/발표연도 | 조선 말기 |
[정의]
조선 말기 안종설 등이 환벽정에 오른 감회와 주변 풍광을 읊은 한시.
[개설]
「환벽정 제영(環碧亭 題詠)」 한시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었던 환벽정의 주변 풍광과 정자에 오른 감회를 읊은 한시로 양산군수를 지낸 안종설(安鍾卨)과 이에 차운한 동래부사 윤필은(尹弼殷)의 시, 그리고 안행탁(安行鐸)과 안병원의 시 등이 전하고 있다. 환벽정은 조선 후기 헌종 때에 안경록이 세웠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환벽정을 세운 안경록과 관련한 기록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소계서원의 소계사 관련기록인 『소계원지』에 9세손의 자격으로 「오충유사」를 쓴 것이 남아 있다. 윤필은은 1900년(고종 37) 5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3개월 후인 동년 8월에 이임한 사실이 『부산금석문』에 실려 있는 「동래부사송덕비」 관련 자료에 남아 있다. 그리고 윤필은과 함께 제영시를 남긴 안종설의 양산군수 재임기간은 1903년(고종 40)에서 1904년(고종 41)까지이다.
안종설과 윤필은의 한시 내용은 유상(遊賞)을 위해 환벽정을 찾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안종설의 경우에는 군수라는 직함을 명기했고 윤필은은 그냥 방운(傍雲)이라는 호만 병기되었을 뿐 직함이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윤필은과 안종설이 환벽정을 찾은 시기는 안종설의 양산군수 재임기간 사이일 가능성이 큰 듯하다. 또한, 윤필은의 시에 "사또를 기다려 나룻터에 서 있도다(留待使君立渡頭)."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종설이 윤필은과 함께 환벽정 주인의 초대를 받아 환벽정을 방문해서 제영시를 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성]
안행탁의 「환벽정 제영」은 오언율시이며, 안종설과 안병원, 윤필은의 「환벽정 제영」은 칠언율시이다. 현전하는 「환벽정 제영」한시는 공통으로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는 전형적인 한시 작법을 취하고 있다. 전반부는 환벽정을 둘러싼 주변 풍광을, 후반부는 환벽정을 찾은 작자의 감회와 주인인 안경록과의 인연을 읊고 있다.
[내용]
현재 환벽정은 없어져서 그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시의 내용으로 보아 정자는 배산임수의 위치에 세워졌던 것 같다. 안행탁의 한시 중에서 ‘산이 둘러 있고 물이 푸른 곳에/ 높은 선비가 누정을 일으켜 세웠네(山環水碧處/ 高士起亭樓).’라는 구절과 ‘창을 밀쳐 백구와 짝하는 도다(推窓伴白鷗).’라는 구절로 보아 환벽정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환벽정 제영」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안종설의 한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련(首聯)의 ‘고사(高士)와 원림(園林)을 보려 말머리를 내었도다’라는 구절은 작시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함련(頷聯)에서는 ‘학취(鶴趣)’라는 말로써 환벽정을 건립한 안경록과 그 뒤를 이은 환벽정 주인의 아취를 나타내었으며, 아울러 꾀꼬리 소리가 종일 들려온다는 말로써 환벽정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
경련(頸聯)에서는 ‘미진(縻塵)’이라는 말로써 군수라는 직책에 얽매여 있는 안종설의 처지를 말하면서 벼슬살이에서 겪는 온갖 험한 일인 환해풍파(宦海風波)의 어려움을 드러내었다. 결련(結聯)에서 ‘돌아갈 마음 급하다’라는 표현 역시 해당 고을 군수이기에 절경 속에 있는 좋은 정자를 두고도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그런 처지를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다운 놀이는 높은 누가각을 보기 위함만이 아나니/ 고사(高士)와 원림(園林)을 보려 말머리를 내었도다/ 학 같은 취향이 고향에 돌아감이 오래임을 이미 보았고/ 꾀꼬리 소리가 종일 흘러나옴에 다시 기뻐하노라/ 진세(塵世)에 얽매여 산에 오를 신을 갖지 못했고/ 세상살이가 물에 오르는 배를 지탱하는 듯하네/ 공과의 인연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돌아갈 마음 급하니/ 한 자리의 풍정(風情)도 내 한을 거두지 못하도다.(淸遊不但訪高樓/ 高士園林出馬頭/ 已看鶴趣還鄕久/ 更喜鶯聲盡日流/ 縻塵未擸登山屐/ 涉世如撑上水舟/ 公緣未了歸心促/ 一席風情恨未收)”
[의의와 평가]
환벽정은 19세기 전반기에 세워진 정자로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는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뿐 아니라 환벽정의 위치나 환벽정 주변 경관 등도 「환벽정 제영」한시를 통해 어느 정도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것이 곧 제영시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이다. 환벽정의 경우, 건물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들 제영시가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환벽정 제영」에는 정자를 통해 지역 내 유력인사들의 교유(交遊)가 이루어졌던 당시 사회상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