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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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晩成 |
영어음역 | Lee Manseong |
이칭/별칭 | 사추,귀락당,행호거사,충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행호거사(杏湖居士)이다. 좌찬성에 추증된 이할(李劼)의 증손이며, 호조참의(戶曹參議) 이유겸(李有謙)의 손자이며, 우의정 이숙(李䎘)의 둘째 아들이다. 후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된 중부(仲父) 이흡(李翕)의 후사가 되었다. 부인은 안동김씨로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이다.
[활동사항]
효종 대에서 경종 대까지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시기에 송시열의 문인으로 노론(老論)에 속했던 인물이다. 1696년(숙종 22) 문과에 급제한 뒤 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지평겸지제교(持平兼知製敎)가 되었으며, 이 때 영의정이 아들을 부정하게 급제시킨 일을 바로잡았다.
이어 교리(校理)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으며, 해구(海寇)가 나타나자 충청도순무사(忠淸道巡撫使)로 나아가 안흥진(安興鎭)을 승격시켜 방어사(防禦使)로 되게 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706년(숙종 32) 대사헌겸승문원제조(大司憲兼承文院提調)가 되었다.
1709년(숙종 35) 대사성이 되어 최석정의 글을 비판하였다가 삭직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이어 1716년에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형조판서(刑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일 때 영조가 왕세제(王世弟)가 되는데 기여한 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옥사하였다. 영조 즉위 후 복관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귀락당집(歸樂堂集)』이 있다.
[묘소]
묘소와 신도비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에 있다. 신도비는 조카인 좌참찬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사헌부지평 민우수(閔遇洙)가 썼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영암(靈巖)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