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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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縡 |
영어음역 | Lee Jae |
이칭/별칭 | 희경,도암,한천,문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이재는 숙종 대에서 영조 대까지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영조의 탕평정치(蕩平政治)에 맞선다는 이유로 자주 파직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만년에는 용인의 한천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등 정계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계]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한천(寒泉). 진사 이만창(李晩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재는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중부(仲父) 이만성(李晩成)에게도 수학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가주서(假注書),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찬집청기사관(撰集廳記事官)으로 『단종실록부록(端宗實錄附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으며,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1708년에 문학(文學), 정언(正言), 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헌납(獻納), 이조좌랑(吏曹佐郞),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使) 등을 역임하였다.
1710년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수찬, 부교리가 되었으며, 이후 응교(應敎), 필선(弼善), 보덕(輔德), 집의(執義) 등이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1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계속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고 1715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입궐하였다. 1716년 곧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이후 호조참의(戶曹參議)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한 뒤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이후 강화유수,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등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다음해에는 대사헌, 이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이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22년(경종 2) 임인옥사(壬寅獄事) 때 중부 이만성이 연루되어 정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자 가족을 이끌고 인제(麟蹄) 가덕산촌(佳德山村)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 일최암(一最菴)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725년(영조 1) 부제학이 되었고 곧 이조참판, 양관 대제학,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듬해 예조참판, 대사헌 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곧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공조참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또 이듬해 형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이조참판 등이 되었으나 역시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형성되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한 후에 용인 한천동에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동지중추부사, 좌윤, 대사헌, 우윤, 이조참판, 대사헌,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저술 활동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736년(영조 12) 이후 형조참판, 이조참판, 예문제학, 대사헌, 한성판윤, 공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이재는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심곡서원(深谷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율곡전서(栗谷全書)』 편찬에 관여하였으며, 『검신록(檢身綠)』,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완성하였다. 1746년 10월에 고양 화전(花田)으로 옮기려다가 광주(廣州)에서 숨졌으며, 용인 한천에 묻혔다.
[학문과 사상]
김창협의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와 이이(李珥)를 사숙한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이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했던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고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반박한 낙론의 대표적 학자이다.
인물성론(人物性論)에 관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은 하나의 이(理)로서 기질(氣質)의 차이에 의해 인성과 물성이 달라지므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를 뿐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같다고 하였다.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윤봉구(尹鳳九)에 대해 심(心)은 기(氣)이지만 반드시 성(性)과 기(氣)를 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하면서 윤봉구의 성범심부동설(聖凡心不同說)을 반박하고, 성범심개동설(聖凡心皆同說)을 주장하였다. 즉 심을 이기(理氣)의 합으로 보아 성인과 범인 모두에게 기질지성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이 있으며, 발(發)하기 전의 심체(心體)에서는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대명의리론을 내세운 노론의 중심인물로서 일관되게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한 노론 준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예학에 밝았으며, 서화에 능했다. 문인으로 박성원(朴聖源)·송명흠·임성주 등이 유명하다.
[저술 및 작품]
『율곡전서』를 산정했으며, 저서로는 『도암집』·『근사심원(近思尋源)』·『오선생휘언(五先生徽言)』·『근사록심원(近思綠尋源)』·『서사윤송(書社輪誦)』·『주형(宙衡)』·『검신록』·『존양록(尊攘錄)』·『사례편람』·『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02년(순조 2) 사액서원인 용인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