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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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瓷-白瓷-産室龍仁陶窯址 |
영어음역 | Cheongjawa Baekjjaui Sansil Yongin Doyoji |
영어의미역 | Porcelain-Producing Kilns in Yongi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장환 |
[개설]
용인시 곳곳에는 천여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각종 도자기를 생산했던 도요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도자기 생산 활동이 이루어진 곳임을 짐작하게 하는 이들 도요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도자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조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 호암미술관에서 용인시 이동읍 서리에 있는 고려시대 백자요지를 발굴·조사하여 그 중요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한국 도자사에서 차지하는 용인의 위상이 한층 제고되었다.
용인 지역에서는 그후에도 수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 1999년에는 용인시와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하여 관련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용인시 전역에 걸친 정밀한 도요지 조사가 이루어져 총 41개 소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도요지 유적 현황]
용인의 도요지 유적들은 크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는 다시 분청사기와 백자 및 기타 요지로 나누어진다.
1. 고려시대 도요지
용인시에서 발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진 고려시대 도요지는 현재까지 5개소에 이른다. 백자를 생산한 곳이 두 곳, 백자와 청자를 생산한 11세기 요지가 한 곳, 그리고 도기를 생산한 곳이 두 곳이다. 전국적으로 전라남도 강진군이나 전라북도 부안군을 제외하고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고려시대 요지가 발견된 예는 많지 않다.
1) 이동읍 서리 중덕마을 고려백자요지(1호)
이동읍 서리 중덕마을 산 23번지에 있는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는 사적 제329호로 지정되어 국내외 학계에 잘 알려진 유명한 유적이다.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가마·진흙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조각 등이 발견되어 고려백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역할을 하는 유적이다. 활동 시기는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어 11세기 전반이나 중엽경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특이하게 백자를 생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84년과 1987년, 1988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호암미술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는, 발굴 결과 가마의 구조도 처음에는 벽돌로 쌓은 가마였다가 다시 그 위에 진흙으로 만든 전혀 다른 가마를 지었으며, 이 진흙가마도 아래위로 이동하면서 처음에는 30~40m 길이의 것을 사용하다 나중에는 이 가마들 위에 다시 83m가 넘는 초대형 진흙가마를 운영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하나의 가마를 설치한 다음, 이를 두고 구조를 바꾸어 가면서 몇백 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처럼 가마 하나만 가지고 오랜 기간 요업을 운영한 경우는 세계 도자사에서도 유례가 없다.
2) 이동읍 서리 상반마을 고려백자요지(2호)
용인시 향토유적 제45호로 지정된 상반마을 고려백자요지는 고려시대(10세기)부터 사용된 도요지로, 실제 유적의 범위는 폭이 약 45m, 상하의 길이가 약 70m에 달하는 매우 큰 규모이다. 도자기를 제작할 때에 사용한 갑발의 퇴적이 우측에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량의 고려백자 파편과 함께 번조시(燔造時)에 사용된 갑발, 가마벽편, 가마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조각 등이 수습되고 있다. 고려백자류는 완·대접·접시 종류가 대부분이며, 간혹 종지뚜껑 등도 보인다.
백자질은 대체로 약간 거친 편이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 단단한데, 유색은 회색이나 녹색이 감도는 백색으로 반투명하여 전체적으로 지방에서 만들어진 고려백자의 특징을 보인다. 이들 백자는 바닥의 접지면에 백색의 내화토를 받친 다음 여러 점을 한꺼번에 포개 쌓은 다음 원통형의 갑발에 넣어 구운 것들이다.
상반마을 고려백자요지에서 발견된 고려백자들은 기형적 특징이나 태토질의 유약 상태, 번조시 사용된 갑발 상태, 내화토를 받치고 포개구이한 방법 등이 인근의 중덕마을 요지의 후기 양상과 완전히 동일하여, 대체로 11세기에 활발하게 요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백자 파편 중에 이른 시기의 해무리굽 완류(碗類)가 드물게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의 발굴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3) 기흥구 보정동 고려청자·백자요지
기흥구 보정동 독정마을 임야에 분포하고 있는 보정리 요지는, 고려 전기인 11세기 무렵에 청자와 백자를 구웠던 가마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가 작고 퇴적 상태도 시원치 않아 채집된 자료가 많지 않지만, 현재까지 경기도에서는 이 시기에 활동한 가마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20m, 세로 30m 정도로, 고려시대의 백자와 청자 파편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가마벽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4) 처인구 호동 고려도기 요지
용인시 호동 길업마을 임야에서 발견된 호동 요지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고려시대에 도기를 생산한 요지이다. 유적은 폭이 30m, 상하의 길이가 40m 정도이며, 이 범위 안에 도기편들과 가마벽편들이 널려져 있다. 고려 초기에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도기질의 광구병(廣口甁)과 항아리 파편들이 주로 발견되며, 간혹 흑유(黑釉)가 채워진 흑유자기 종류로 보이는 파편들도 수습되고 있다.
5) 수지구 죽전동 고려도기 요지
수지구 죽전동의 단국대학교 진입로 곁 야산 구릉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이다. 형태나 도기질의 상태로 보아 대체로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요지로 보이며, 주변에서 숯이 발견되고 있어 가마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처인구 호동 요지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고려시대 도기편들이 수습되는데, 항아리 종류가 많고 병과 시루, 장군 등도 보인다.
2. 조선시대 도요지
용인시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도요지는 모두 36개소이다. 그중에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이 5개소이고, 백자·흑자·옹기를 제작하던 곳이 31개소에 달한다. 경기도 광주(廣州)를 제외하고 한 지역에서 이처럼 다수의 요지가 발견되는 곳은 드문 편이다.
1) 분청사기요지
현재까지 용인시에서 조선시대 분청사기요지로 조사된 곳은 5개소이다. 대체로 상감과 인화문 분청사기를 생산한 요지들로서 용인의 지역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이동읍 서리 분청사기요지(4호)
이동읍 서리 사기막골 임야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요지로, 폭은 약 40m, 상하의 길이는 45m에 달하는 큰 규모이다. 지표에서는 다량의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벽편 등이 확인되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분청사기는 입술 부분이 외반된 대접과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은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분청사기의 경우 대부분의 그릇 표면이 상감과 인화, 귀얄분장으로 장식되어 있다. 분청사기 외에도 표면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청자 파편들도 발견되며, 항아리 종류로 보이는 도기 파편들도 보인다. 또한 그릇을 구울 때 받침으로 사용된 요도구들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2) 원삼면 학일리 3호 분청사기요지
학일리 3호 분청사기요지는 학일리의 쌍용저수지 남쪽 끝에서 임야 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조선 말기에 운영되던 백자요지가 있다. 주변에 약간의 퇴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소규모 요지로 추정되는데, 지표에서 분청사기와 청자 파편 및 요도구들이 채집되고 있다.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가 주류를 이루며 병 편도 보인다. 유색은 대부분 암록색을 띠며, 바닥에는 태토비짐이나 모래를 받쳐 구웠다. 인화문의 양상으로 보아 가마의 활동 시기는 15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3) 원삼면 학일리 4호 분청사기요지
원삼면 학일리 산 37-1번지 임야 일대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1호 요지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요지의 크기는 가로 20m, 세로 20m이다. 주로 분청사기와 청자·요도구·가마벽편들이 발견되는데, 지방의 분청사기 가마에서 일반적으로 행한 포개구이를 한 예가 보이지 않아 주목된다. 이는 곧 한점 한점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용인의 여타 분청사기요지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특수한 수요층을 겨냥하여 질좋은 분청사기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시기는 1호 가마와 같은 15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
(4) 백암면 고안리 분청사기 도요지
도예가 한익환(韓益煥)이 처음 발견한 분청사기 도요지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암면 고안리의 지내마을 남쪽에 있는 일명 사랑골 안에 위치하는데, 지표에 보이는 분청사기 파편이나 가마벽편들의 범위는 가로 30m, 세로 40m에 이른다. 주로 짙은 암록색의 무문청자류와 상감분청사기·인화분청사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과 접시류가 대부분이고, 제기·항아리 편들도 소량 보인다. 조선 전기인 15세기 전반경에 운영된 소규모 가마로 추정된다.
(5) 백암면 석천리 분청사기 도요지
백암면 석천리 산 28-1번지 임야 일대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류형원 선생 묘가 있는 오른쪽 산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나, 가마 유적과 퇴적의 일부가 류형원 선생 묘 우측 편에 일부 노출되어 있다. 주로 분청사기가 채집되며, 문양 장식이 없는 청자 파편과 다양한 요도구들도 보인다.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며, 간혹 병도 보인다. 15세기 전반경의 인화문이 발달하던 시기에 운영된 가마로 추정된다.
2) 백자 및 기타 요지
용인 지역의 백자요지는 모두 27개소로 알려져 있다. 이중 24개소에서는 백자만 발견되었으나, 다른 3개소에서는 흑자(黑磁)와 옹기가 함께 확인되었다.
(1) 처인구 호동 2호 요지
처인구 호동 산 100번지에 위치한 요지로, 15~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요지의 위쪽은 임야와 접해 있지만 중심의 대부분은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둔덕과 지표에 파편이 흩어져 있다. 파편이 쌓여 퇴적을 이루고 있는 둔덕의 일부에서 백자와 요도구 및 가마벽편 등이 발견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에서 발견되는 조선 전기 백자요지 파편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백자 파편은 대접과 접시·잔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잔받침과 병도 드물게 나타나며, 장식이 있는 예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접은 주둥이의 가장자리가 밖으로 살짝 벌어진 것을 비롯하여 형태와 크기가 서로 다른 네 종류가 확인되며, 접시는 세부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는 세 종류가 확인되었다.
(2) 처인구 호동 3호 요지 및 건물지
처인구 호동 산 101-1번지 일대 임야 및 밭에 있는 유적지로, 백자와 함께 여러 점의 도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조선 전기의 백자요지에서 백자와 도기 파편이 함께 확인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파편의 분포 형태나 유물의 종류, 요도구나 가마벽 등이 확인되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요지와 관련한 작업시설이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백자는 주둥이의 가장자리가 밖으로 벌어진 대접과 접시가 주류를 이루지만 이외에도 병이 발견되는데, 표면에 장식이 있는 예는 볼 수 없다. 도기는 대부분 항아리의 파편으로, 주둥이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백자와 다수의 도기가 발견되는 것도 특이하지만, 죽절굽과 도립삼각형굽이 혼재하는 양상도 관심을 끄는 곳이다. 15세기에 운영된 요지로 추정된다.
(3) 처인구 운학동 1호 요지
처인구 운학동 168번지에 위치한 유적으로,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표면이 파손되었다. 밭과 밭 사이의 둔덕에 경작시 출토된 백자편이 집중되어 있다. 유물은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며, 이외에 병이 한 점 확인되었다. 대접은 형태와 크기가 모두 유사한데, 기벽의 선이 사선에 가까운 완만한 곡선이며, 안바닥은 넓은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17세기 지방에서 제작되던 백자의 특징이 잘 보여주고 있다.
(4) 처인구 운학동 2호 요지
처인구 운학동 49번지 문화류씨의 묘지 입구에 위치한 요지로, 폭이 30여 m, 상하의 길이가 90여 m에 달한다. 다수의 백자 파편과 번조시 사용했던 태토비짐의 받침이 흩어져 있지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파편은 대부분 잘게 부수어진 대접과 접시이다.
대접은 형태에 따라 주둥이의 가장자리가 밖으로 벌어져 있고 안바닥에 원각이 있는 것과, 주둥이가 직립하며 안바닥이 편평한 소위 ‘내만대접’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종류는 15~16세기 백자요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접시는 여러 점이 확인되지만 크기와 형태가 모두 동일하며, 유약의 색이나 굽의 형태, 받침 등은 대접의 특징과 동일하다.
(5) 처인구 해곡동 1호 요지
처인구 해곡동 산 18-3번지 임야에 위치한 유적이다. 나지막한 구릉의 일부가 밭으로 개간되고 한쪽에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다량의 백자 파편이 흩어져 있다. 지표에서 확인되는 유적은 가로 40m, 세로 30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백자 대접과 접시가 주류를 이루지만 발(鉢)·잔·제기 등도 소량 나타나며, 이외에도 도기가 드물게 확인되었다. 또한 백자의 제작에 사용된 요도구도 다수가 발견되었다. 비록 발은 한 종류만이 확인되지만, 조선 전기의 요지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기종이기도 하다. 특히 아령 모양의 도침은 16세기 원반형 받침과 17세기에 많이 사용된 아랫부분이 경사진 받침의 과도기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6) 기흥구 지곡동 1호 요지
지곡동의 지곡리 1호 요지는 19세기 말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기흥구 지곡동 236번지[지삼로201번길 31-4] 집터 뒤 구릉 단애면에 퇴적이 형성되어 있지만, 집과 도로공사로 일부가 훼손되었다. 유적의 크기는 가로 15m, 세로 10m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병과 항아리, 주자(注子) 등의 흑자와 옹기, 그리고 요도구가 발견되었다.
(7) 기흥구 지곡동 2호 요지
지곡동 산 160-5번지 임야에 위치하고 있는 지곡리 2호 요지는 19세기 말에 운영되었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는 나지막한 구릉이었지만 주변의 도로공사와 개간으로 평지에 가깝게 형태가 변경되었다. 밭의 가장자리에 파편이 집중되어 있지만 수량은 많지 않으며, 현상 변경으로 정확한 퇴적의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지표에서 확인되는 유적의 범위는 가로 10m, 세로 10여 m이나, 대부분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옹기 항아리와 요도구가 발견되었다. 2009년 건물이 세워지는 관계로 요지가 없어졌다.
(8) 기흥구 지곡동 3호 요지
지곡리 3호 요지는 지곡동 산 28-10번지에 위치한 유적이다. 휴양소 부근의 구릉과 개울이 접한 곳에 퇴적이 노출되어 있으며, 밭으로 개간된 주변에도 파편이 흩어져 있다. 요지의 규모는 가로와 세로 각각 10m 정도로, 개울에 의한 침식과 개간으로 퇴적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퇴적에서는 대접과 접시·잔 등의 백자 파편이 다량으로 발견되며, 요도구와 가마벽편, 소토(燒土)도 확인된다. 그릇의 종류와 크기가 단순한데, 굽을 오목하게 깎은 후 굵은 모래를 받쳐 번조하는 것은 광주(廣州) 선동리 등의 요지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경기도 일대의 17세기 백자요지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9) 수지구 신봉동 1호 요지
신봉동 산 98-1번지[신봉1로366번길 29-9]에 있는 신봉동 1호 요지의 규모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0m 정도이다. 서봉마을 뒤쪽의 영험사로 올라가는 길목의 소로와 냇가 사이의 풀숲에 퇴적이 노출되어 있다. 대접과 접시 모양의 백자 파편 제기 등과 항아리 등의 흑자(黑磁)가 발견되며, 요도구와 가마벽의 파편도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백자 대접은 형태와 크기가 다른 두 종류가 발견되는데, 질이 좋은 백토로 제작되었다. 제기는 몇 점이 발견되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작은 접시의 모양이지만 굽이 매우 높다. 이러한 형태는 대접과 마찬가지로 조선 말기의 요지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종류이기도 하다. 흑자는 항아리와 종류를 알 수 없게 잘게 부수어진 파편이 다수 확인된다. 19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10) 양지면 남곡리 1호 요지
남곡리 756번지 은이골 골짜기에 위치한 남곡리 1호 요지 유적은 건물을 짓기 위하여 터를 고르고 주변을 철망으로 막아 놓은 대지에 속해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30m, 세로 30여 m로 추정되지만, 평탄 작업으로 정확한 위치와 범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곳에서는 대접과 접시 등의 백자와 요도구, 가마벽편 등이 확인되었다.
대접은 형태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종류가 발견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안바닥에는 모두 원각(圓刻)이 있다. 질이 좋은 백토를 사용하였으며, 표면에는 담청색 유약이 입혀져 있다. 이러한 형태와 특징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15~16세기 백자요지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1) 양지면 대대리 1호 요지
대대리 1호 요지는 양지면 대대리를 가로질러 경기도 광주의 도척면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산 200번지)와 인접해 있다. 원래는 낮은 구릉지로 추정되나 지금은 낙차가 큰 계단식 밭과 논으로 개간되어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30m, 세로 90여 m로, 대접과 접시·잔·병·항아리 등의 백자 파편과 요도구·물레도구 등이 확인되었다.
대접은 형태와 특징에 따라 두 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모두 장식은 없지만 안바닥에 직경이 비교적 큰 원각이 있다. 접시 역시 대접만큼이나 많은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크기와 형태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요지로 추정된다.
(12) 양지면 대대리 2호 요지
대대리 2호 요지는 대대리 산 224번지[한터로 716-1] 임야에 있는 유적이다. 경기도 광주의 도척면으로 향하는 도로의 우측 편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동시대에 운영된 또다른 요지가 있다. 주변에 건물을 세우면서 평탄 작업을 하여 퇴적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건물과 유적 사이에는 가마벽편과 백자 파편을 모아 만든 지름 1.2m, 높이 1m 정도의 원형 2단을 이루는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지표에서 확인되는 유적의 범위는 가로 20m, 세로 20여 m에 달한다. 이곳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발(鉢), 잔, 병, 항아리 등 다양한 백자 파편과 요도구가 발견된다.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와 인접한 곳으로, 백자의 종류가 다양하고 질이 좋은데다 광주 지역에서 만들어진 백자와 동일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들의 영향 관계까지도 연구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지이다. 17세기에 운영된 요지로 추정되고 있다.
(13) 양지면 대대리 3호 요지
대대리 2호 요지와 약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지로,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어 사용되고 있다. 밭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경작시 출토된 파편과 가마벽편 등을 모아 두었으며, 주변에 크고 작은 파편들이 넓게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수의 대접과 접시 외에 발·병·항아리 등의 백자와 요도구가 확인되는데, 특히 적갈색의 철사안료로 장식된 철화백자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14) 이동읍 서리 1호 요지
서리 1호 요지는 이동읍 서리 1176번지에 있는 유적지이다. 상덕저수지 위쪽에 접해 있는 비포장 소로에 접한 낮은 구릉지로, 중심에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은 경지정리로 현상이 변경되었다. 지표에는 대략 가로 20m, 세로 20m의 범위에 백자 파편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대접과 접시·잔 등의 백자 파편과 요도구, 가마벽편 등이 확인된다. 대접은 몸체와 굽의 형태가 서로 다른 세 종류가 발견되는데, 모두 장식은 없고 굽안바닥을 언저리보다 깊게 깎아낸 것이 특이하다.
(15) 이동읍 서리 2호 요지
이동읍 서리 311-1번지[백자로297번길 49] 밭 일대에 위치한 서리 2호 요지의 규모는 좌·우변의 폭이 20여 m에 달하고 상하의 길이가 약 30m에 이른다. 서리 2호 요지에서는 대접과 접시 등 백자와 함께 흑자가 발견되는데, 지역적으로나 위치상 두 종류의 자기가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 종류를 동시에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흑자와 도기로서, 이들은 병과 항아리·주전자와 같이 비교적 커다란 종류가 대부분으로, 대접과 접시가 주류를 이루는 백자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19세기에 운영된 요지이다.
(16) 이동읍 서리 3호 요지
서리 3호 요지는 이동읍 서리 318번지 소로변에 접해 있는 낮은 구릉에 위치한 유적으로, 앞부분은 건물의 축조로 크게 파손되었다. 건물 공사로 절단된 구릉이 이 요지의 퇴적층으로 높이 3m 가량의 단애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백자 파편이 다량 흩어져 있다. 유적의 폭은 20여 m에 달하지만, 길이는 10m 정도로, 단애면 위쪽에 숲이 형성되어 있다.
대접과 접시는 물론 발·잔·종지·항아리 등의 백자와 요도구가 발견되는데, 특히 철화장식이 있는 철화백자도 확인된다. 백자의 경우 형태나 유색 장식 등이 17세기 백자요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백자에 비해서도 질이 좋은 편에 속한다.
(17) 이동읍 천리 1호 요지
이동읍 천리 1번지에 위치한 천리 1호 요지는, 원래 나지막한 구릉지였으나 일부가 밭과 논으로 개간되고 한쪽에는 묘가 조성되면서 유적이 훼손되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20m, 세로 10m 정도로, 논과 밭 사이의 소로에 경작시 출토된 파편들이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접·접시·잔·병 등의 백자 파편과 요도구가 흩어져 있다. 15~16세기에 운영된 요지로 추정된다.
(18) 이동읍 천리 2호 요지
천리 2호 요지는 이동읍 천리 산 19번지 임야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적동 전원주택 단지 뒤편으로, 포장도로에서 계곡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밭과 임야 사이에 위치해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40m, 세로 약 30m에 달하는데, 대접과 접시를 비롯한 발·잔·항아리 등의 백자 파편과 소량의 도기와 요도구가 확인된다. 대접은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른 세 종류가 발견되고, 접시는 두 종류이다. 그릇 받침으로 사용한 요도구와 가마의 안쪽에 해당하는 면에 백토를 얇게 바른 가마벽편도 다수가 발견되었다.
(19) 이동읍 묵리 1호 요지
이동읍 묵리 산 66-1[이원로601번길 58]에 위치한 묵리 1호 요지는 묘목을 심기 위하여 평탄작업을 마친 상태로, 퇴적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20m, 세로 20m 정도로, 다수의 대접 및 접시 파편과 가마벽편이 발견되었다. 대접은 지표에 흩어져 있는 수량이 많지만 형태와 크기가 유사한 예가 많아 두 종류로 추정된다. 주둥이의 가장자리가 밖으로 살짝 떨어져 있는 점과 안바닥에 직경이 큰 원각이 있는 점 등 15~16세기 백자요지에서 제작된 것과 동일한 특징을 보인다. 접시도 다수의 파편이 발견되지만 유색과 굽 등 세부적인 특징은 대접과 동일하다. 조선 전기에 운영되던 백자요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20) 이동읍 묵리 2호 요지
이동읍 묵리 507-2번지 밭에 위치한 묵리 2호 요지는 한쪽 면이 하천의 침식과 건물공사로 단애를 이루고 있다. 단애면을 정면에 두고 좌측에는 백자가 많이 발견되며, 우측으로 약 90m 떨어진 곳에는 흑자의 퇴적이 보인다. 백자 파편의 경우는 공사시 출토되어 단애면으로 모아 둔 것으로 추정되지만, 흑자는 원 퇴적이 파손되며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백자의 경우 주로 대접과 접시가 발견되며, 흑자는 병과 항아리가 많이 보인다.
(21) 이동읍 화산리 1호 요지
화산리 1호 요지는 이동읍 화산리 산 100번지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낮은 구릉 가장자리와 밭 일부에 걸쳐 다량의 백자 파편이 분포하는데, 경작지 정리로 인하여 퇴적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인 유적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폭과 상하의 길이가 각각 30m 정도를 이루며, 경작지 정리시에 출토된 파편을 밭과 밭 사이의 둔덕에 모아 두었다.
화산리 1호 요지에서는 다량의 대접과 접시·잔 등이 발견되는데, 대접은 형태와 크기에 따라 모두 여섯 종류로 나뉘며, 접시는 두 종류이다. 잔은 세 종류가 확인되는데 크기의 기복이 크다. 전체적으로 그릇의 종류는 단순하지만 크기나 세부의 형태를 달리하여 제작된 것으로, 이러한 현상은 17세기 백자요지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22) 이동읍 화산리 2호 요지
화산리 2호 요지는 이동읍 화산리 산 60번지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 유적지로 일대가 울창한 전나무숲을 이루고, 아래쪽에는 비교적 커다란 개울이 흐른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30m, 세로 20여 m에 달하며, 형질의 변화가 적어 보존 상태가 좋다. 이곳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잔과 종지 등 백자와 요도구가 다량 발견된다. 백자와 받침이 경기도 일대에서 발견되는 17세기 백자요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23) 원삼면 문촌리 1호 요지
문촌리 1호 요지는 원삼면 문촌리 산 35-1번지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유적지로, 측면 한 곳은 비교적 폭이 좁은 냇물과 접해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20m, 세로 30m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지표에 노출되어 있는 가마의 크기는 폭이 1.4m, 길이는 13m이며, 굴뚝의 폭은 3m이다. 또한 가마 내부의 칸막이가 잘 남아 있어 주목되는 곳이다. 문촌리 1호 요지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잔·항아리·제기 등의 백자가 다수 발견되는데, 특히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백자 파편이 발견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24) 원삼면 문촌리 2호 요지
원삼면 문촌리 산 50번지 일대에 있는 문촌리 2호 요지는 20세기 초 천주교도들에 의해 옹기가 제작되던 유적지이다. 현재는 묘지 조성과 개간으로 형질이 크게 변경되어 지표에 소량의 파편이 흩어져 있을 뿐, 유적의 규모나 특징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옹기는 대부분 항아리 파편으로, 태토는 적갈색을 보이고 표면에는 밤갈색의 유약이 얇게 입혀져 있다.
(25) 원삼면 학일리 1호 요지
원삼면 학일리 산 55번지 구릉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택지와 밭으로 개간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현재 이종철의 집(52번지) 주변에 많은 가마벽편이 산재하고, 유창희의 집(76-2번지)과 이어지는 작은 밭에 다수의 백자 파편이 흩어져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30m, 세로 30m 정도이다. 대접과 접시, 병 등의 백자 파편과 요도구가 주로 발견되고 있다.
(26) 원삼면 학일리 2호 요지
학일리 2호 요지는 원삼면 학일리 532번지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 밭에 위치한 유적이다. 아래쪽으로 비탈진 사면을 거쳐 냇물로 이어진다. 퇴적물이 흩어져 있는 범위는 가로 25m, 세로 25m 정도인데, 아래쪽에 파편 퇴적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지표에는 가마 구조물이 노출되어 있는데, 가로 1.7~3.0m 폭에, 세로 15m 정도의 길이를 갖춘 크기로 보존 상태가 좋다. 가마의 위쪽에는 굴뚝의 축조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탄 돌들이 많이 보인다. 다량의 대접과 접시 및 소량의 제기와 같은 백자 파편과 요도구·가마벽 등이 발견되고 있다.
(27) 백암면 용천리 1호 요지
용천리 1호 요지는 백암면 용천리 산 53번지 산자락에 위치한 유적이다. 현재는 구릉의 일부가 밭으로 개간되면서 유적의 일부가 훼손되어 구릉의 끝자락에만 퇴적이 쌓여 있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15m, 세로 10m 정도이며, 가마벽편의 양에 비하여 파편의 수가 매우 적다. 가마벽편과 함께 옹기가 발견되는데, 옹기는 모두 항아리이다.
(28) 백암면 용천리 2호 요지
백암면 용천리 산 31번지에 위치한 유적으로, 주변이 모두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용천리 2호 요지는 매우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표에는 세 개의 대규모 파편 퇴적이 형성되어 있으며, 당시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파편이 주변에서 소수 발견된다. 유적의 범위는 가로 50m, 세로 50m 정도로 대규모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다량의 대접과 종지 등 백자와 요도구는 확인되나 접시류가 발견되지 않는 등 그릇의 종류가 매우 한정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29) 백암면 용천리 3호 요지
백암면 용천리 산 55-1번지의 낮은 구릉 일부와 개울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유적이다. 침식에 의해 형성된 구릉의 단애면 두 곳에 약 15m 간격으로 퇴적층의 단면이 노출되어 있다. 주변에는 붉은색의 소토(燒土)와 함께 다량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유적의 범위는 폭 25m, 상하의 길이가 10m 정도이다. 대접과 접시를 비롯한 종지와 제기 등의 백자와 요도구가 발견되었다.
(30) 남사면 원암리 1호 요지
남사면 원암3리 5번지[원암로 294]의 임야 가장자리에 위치한 요지로, 주변이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지표에서 확인되는 유적의 규모는 폭이 30m, 상하의 길이가 약 40m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잔과 종지 등의 백자와 다량의 옹기가 발견되고 있는데, 백자와 옹기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드문 요지에 속한다.
(31) 남사면 원암리 2호 요지
남사면 원암3리 5번지[원암로 294]에 있는 임야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요지로, 주변이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폭이 30m, 상하의 길이가 약 40m에 달하는 대규모 요지로, 다량의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잔과 종지 등의 백자와 요도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40m 정도 떨어진 곳에 19세기에 백자와 옹기를 제작하였던 원암리 1호 요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