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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1091
한자 衣生活
영어의미역 Costum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경혜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 지역에서 몸에 걸치거나 입었던 의복 및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울릉군 지역은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의생활 양식이 현대화되어 있다. 특히 2007년 현재 대부분 일상복으로 양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결혼식 폐백이나 상복 등 특별한 의례복으로만 전통 복식이 착용되고 있다.

[변천]

입도 초기에는 봉목·광목·옥양목 등이 육지에서 들어왔으나 명주와 삼베는 울릉도에서 자체 생산되었다. 삼[대마]은 폭포수 아래에서 재배하였다. 베와 명주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삼베와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잘 사는 집은 모시옷을 입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물레와 베틀을 구입하거나 직접 제작했으며 옷감을 생산하는 일은 농사일과 더불어 가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집집마다 삼베밭이 있었고 삼베를 수확하고 찌는 일은 마을에서 서로 협력하였으며 베틀이 없는 집에서는 품을 주고 빌리기도 했다.

울릉도에서는 해방 후에도 삼베와 명주옷을 입다가 1950년대가 넘어서면서 한복을 입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고, 도동을 중심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들도 생겼다. 도동에서는 주민의 반 정도만 한복을 입었고 반 정도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옷감을 자체 생산하기보다는 육지의 옷감을 구입하기 시작했으며 각 가정에서는 재봉틀을 비치하여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1970년대~80년대에는 물감을 사서 물을 들이기도 했으며 도동의 옷 가게에서 옷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구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옷을 ‘내려입는[물려입는]’ 일이 보통이었다. 근래에는 울릉도 주민들이 유행에 민감한 것을 일컬어 ‘서울 가면 김해 신사는 표시가 나지만 울릉도 신사는 표시가 나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이다.

오늘날 주민들은 도동에 있는 현대화된 옷가게와 장식품 가게를 통해 육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옷을 사 입는다. 옷은 서울 번개시장에서 주로 가져온다. 여자들은 육지에 자주 나가기 때문에 유행을 빨리 받아들인다. 최근에는 포항 등지에서 직접 구입하거나 인터넷 쇼핑을 이용한다.

[일상복]

여름에는 대부분 삼베나 모시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겨울에는 광목과 명주로 된 옷에 머리에는 남바위를 썼다. 비가 올 때에는 갈모를 썼다. 갈모는 기름을 먹인 갈모지에 가는 대오리로 접은 뒤 칸살마다 살을 넣어 붙이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달아 만들었다. 펼치면 고깔 모양이 되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된다.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고 안쪽 양옆에 달린 끈으로 턱에 매었는데, 갓 없이 쓸 때는 갈모테를 쓴 다음에 썼다.

남녀노소 공용으로 사용되던 방한모로 이엄(耳掩) 또는 난이(暖耳)라 하는 모자를 썼다. 안감은 융이나 털이 붙은 가죽으로, 겉감은 두꺼운 비단 또는 모 등의 천으로 만들었다.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귀를 거쳐 목과 등을 덮으며 위로는 구멍이 트여 있다.

오징어잡이를 인력으로 할 때 작업복은 오징어가 쏜 물에 옷이 젖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옷에 물이 젖지 않도록 ‘갑바’[비옷]를 입는다. 과거에 비옷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에는 갈대로 만든 외투를 덧입었다. 신발은 장화나 반장화를 신는다.

학생복의 경우 1960년대까지 초등학생의 경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를 메고 등교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가방과 운동화, 비닐 구두가 보편화되었다. 1980년대부터 도서 지역부터 시험적으로 실시한 교복 자율화로 인해 고등학생들에 한하여 자율 복장을 하였다.

신발의 경우에는 1950년대 중반까지 주민들은 짚으로 만든 조례와 총신을 신었다. 총신은 버선을 신은 뒤에 신는 것이었고, 조례는 맨발로 여름철에 많이 신었다. 50년대 중후반부터 ‘다이야몬드표’ 검정 고무신과 백 고무신을 신기 시작했다.

[의례복]

1950년~1960년대 초까지 기제사나 명절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은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탕건과 갓을 썼다. 제관뿐 아니라 장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의관을 갖추었다. 지금은 모두 정장 차림으로 제를 지낸다. 1960년대까지 상주들은 굴건제복에, 머리와 허리에는 새끼 띠를 묶었으며 여자들은 무명으로 된 흰 한복을 입었다. 으레 상이 나면 여자들의 옷은 마을의 부녀자들이 모여서 지어주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의례복이 비교적 간소해지면서 맏상주만 굴건제복을 입었고, 그 외에는 두건만 썼다. 1980년대에는 상복을 입지 않고 검은 양복에 리본을 찼으며, 1990년대 이후부터는 완장을 차며 여자들은 검은 한복을 입는다. 1960년대 말까지 혼인식을 치룰 때에는 남자는 사모관대를 입고 여자는 원삼에 족두리를 썼다. 이러한 혼례복은 가마와 마찬가지로 마을 공동 물품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빌려 입었다. 족두리는 의식 때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관(冠)으로서 검은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아래는 둥근 원통형이고 위는 부드럽게 6모가 졌다. 내부에는 솜이 들어있지만 가운데는 비어 있어 머리 위에 얹고 비녀를 질러 고정한다. 비녀[簪]는 부녀자의 긴 머리를 틀어서 고정시키기 위해 꽂거나 관이나 가체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해 꽂는 장식품의 하나로 비녀의 크기가 큰 것은 주로 예복용으로, 작은 것은 일상용으로 쓰였다.

전통 혼례에서 살아있는 기러기 대신으로 목재로 만든 목기러기를 사용하였다. 혼례시 교배례에 앞서 치러지는 전안례에 사용되는 의물(儀物)로서 형상 때문에 ‘오리’라 부르기도 한다. 머리는 제 몸과 같이 만들기도 하나 따로 만들어 몸통에 구멍을 파 끼워 사용하기도 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전통 혼례보다는 신식 혼례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미장원이나 사진관 같은 곳에서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 예식 장소는 마을 회관이나 교회를 빌렸으며 내부는 부인 친구들이 꾸며주었다. 최근에는 결혼식은 육지에서 하고, 결혼식 후에 울릉도에서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여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에는 돌이나 백일 때에 색동저고리를 입지만 과거에는 특별한 옷을 입지 않았다. 그저 ‘돌재비[돌잡이]’를 할 수 있게 실타래와 연필, 돈 등을 놓고 미역국과 밥으로 된 상을 차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 『울릉군지』 (울릉군지편찬위원회, 2007)
  • 인터뷰(도동리 주민 손해순, 여, 86세)
  • 인터뷰(도동리 주민 박태준, 남, 57세)
  • 인터뷰(도동리 주민 박경룡, 남, 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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