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615 |
---|---|
한자 | 李應台墓出土- |
영어음역 | Yieungtaemyo Chulto Mituri |
영어의미역 | Hemp-cord Sandals from the Yi Eungtae's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규복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서 출토된 조선 중기 미투리.
[개설]
1998년 4월 이응태(李應台, 1556~1586) 무덤에서 애절한 필치로 쓴 원이엄마의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다큐멘터리저널 『내셔널지오그래픽』, 고고학 잡지 『엔티쿼티』와 중국의 국영 텔레비전 CCTV-4 등을 통해 소개되었다.
[연원]
1998년 4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는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 택지개발 계획에 따라 고성이씨 집안의 이름 모를 무덤을 발굴하였다. 무덤 발굴 시 단단한 회곽(灰槨) 안에서 나뭇결이 생생히 살아 있는 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의 주인은 키 180㎝ 정도의 건장한 남자로 장례 당시의 염습(殮襲)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원이엄마의 편지 만사(輓詞), 형이 쓴 만시(輓詩), 부채에 쓴 한시(漢時), 미투리, 장신구 등이 수습되었다. 이를 보존처리하고 형태를 복원하여 1998년 9월 ‘450년 만의 외출’이란 제목으로 제4회 안동대학교 박물관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안동 정상동 일선문씨와 이응태묘 발굴조사 보고서』는 그 연구 결과물이다. 현재 미투리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이응태 묘 출토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으로 삼았다. 이장을 하기 위해 관을 해체했을 때 망자의 머리맡에 한지로 정성껏 싼 물건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투리였다. 미투리를 싼 한지에 적은 글씨로 미루어 보아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을 위해 미투리를 삼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결초보은(結草報恩)하는 마음이 담긴 듯했다.
신바닥은 삼을 꼬아 만든 신날에 삼과 머리카락으로 바닥을 짰다. 바닥은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두툼하게 짰는데 까칠한 삼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많이 사용하여 착용감을 좋게 했다. 발등에 걸치게 되는 앞총날과 앞코, 그리고 뒤축은 튼튼하게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쓰지 않고 삼을 꼬아 사용하였다.
앞총날과 뒤총날에는 까칠한 삼 표면에 의해 발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한지를 감아서 마무리했다. 신총은 발가락과 앞발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미투리는 대개 앞코를 기준으로 한 편에 25~35개 정도가 되게 하여 한 짝에 50~70개 정도로 아주 조밀하게 삼으나, 이 미투리는 한 편에 9개씩 한 짝에 18개의 신총을 엮었다.
신바닥을 이루고 있는 신날은 삼을 꼬아 4날 미투리를 짰다. 짚신보다 더 고급인 미투리의 경우 신날은 대개 6날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미투리는 4날로 했고 신총도 18개로 이루어져 있어서 실제로 신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삼을 가늘게 꼰 줄 2가닥을 준비한 다음 이것을 반으로 접어 4줄로 하여 신날을 삼았다. 삼 줄이 늘어지지 않게 잡아당긴 다음 바깥 줄은 미투리의 외형을, 안쪽은 신바닥의 골격을 잡아줄 신날로 사용했다. 신바닥을 이룰 신날이 갖추어지면 삼과 머리카락을 섞어가면서 미투리의 바닥을 앞쪽에서부터 짰다.
신바닥을 뒤축까지 완성하면 신날 4가닥을 반으로 나누어 2줄씩 합친 다음 삼으로 탱탱 감아 흐트러지지 않게 한 다음 뒤축으로 사용했다. 두 가닥으로 뒤축을 완성한 다음 양쪽으로 갈라서 뒤총날로 삼고 다시 앞으로 돌려 올개총에서 앞총날과 같이 묶어서 미투리를 완성했다.
미투리의 앞부분은 미리 준비해 둔 삼줄(앞총날)로 신총의 끝을 왼쪽부터 시작하여 한 가닥씩 차례로 쇠바늘로 꿰어 오른쪽까지 꿴 다음 미투리의 가운데에 만들어놓은 올개총에서 뒤총날과 함께 단단하게 묶어서 완성했다. 이렇게 완성한 미투리의 앞총날과 뒤총날을 한지로 감아서 마무리했다.
[용도]
미투리는 짚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짚이 아닌 다른 재료를 가지고 짚신과 같은 형태로 삼은 신발을 말한다. 재료는 주로 삼, 닥나무, 칡넝쿨, 왕골, 면사 등을 이용해서 정교하게 만들었다. 미투리는 짚신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신발이었지만 값이 워낙 비싸서 가난한 서민들은 잘 신을 수도 없었다. 짚신은 만들기도 쉽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아서 값도 쌌지만 미투리는 만들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렸으며 값도 짚신 열 켤레 값은 줘야 살 수 있을 만큼 비쌌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이응태의 묘에서 발굴된 유품 중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를 통해 이응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미투리를 싸고 있던 한지가 훼손되어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신 신어 보지도 못하고…’ 라는 내용으로 보아 병석에 누운 남편을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았으나 신어 보지도 못하고 죽자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어준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