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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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張氏 |
영어의미역 | Andong J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춘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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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성씨시조 | 장정필(張貞弼) |
입향시조 | 장의(張儀) |
[정의]
장정필을 시조로 하고 장의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장씨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더불어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의 하나로 시조 장정필(張貞弼) 이후 안동을 근거지로 세거해온 성씨이다.
[연원]
시조 장정필의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로 원래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재의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났다. 9세기 말 경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와서 강릉과 안동에 머물렀고 만년에는 안동에 정착하였다. 젊었을 때는 다시 당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를 지내기도 했다.
930년(태조 13) 병산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견훤(甄萱)의 군대를 크게 물리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다. 당시 왕건이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옛 지명)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고 장정필에게 본관을 안동으로 하사하여 이때부터 안동장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입향경위]
장사길(張思吉)의 5세손 장의(張儀)는 고려 말 위화도회군 때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서 조선개국일등공신으로 참찬의정부사가 되었으나 조선 초의 불안한 정국을 피하여 선대의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시조 장정필의 묘소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장의의 5세손 장팽수(張彭壽)는 권덕기(權德祺)의 사위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종동서간이다. 장팽수의 아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맥을 이어 평생을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한 학자로서 처음에는 김성일의 문하에 수학하였으나 김성일 사후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여 도학을 이루었으며 저서로 「인수변(人獸辨)」,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등이 있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뒤에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장흥효의 딸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安東張氏)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자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을 남겼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학발시(鶴髮詩)」 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장부인의 아들 존재(存在) 이휘일(李徽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손자 밀암(密庵) 이재(李栽)는 모두 학행으로 이름이 높은 이들이며 이황의 학맥도 이들에게로 이어졌다.
[현황]
현재 서후면 금계리에 안동장씨 집성촌이 있으며, 장흥효의 후손들은 서후면 소재지인 성곡리에 종가를 비롯하여 40여 호가 살고 있다.
[관련유적]
장태사의 묘소 및 재사가 서후면 성곡리 제일에 있고, 경당고택(敬堂古宅)이 서후면 금계리 춘파(春坡)에 있다. 또 장흥효를 제향한 경광서원, 장흥효가 책을 읽고 소요하던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가 서후면 금계리에 있고, 강학하던 봉림정사(鳳林精舍)가 서후면 성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