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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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復一 |
영어음역 | Gim Bokil |
이칭/별칭 | 계순(季純),남악(南嶽),김씨오룡(金氏五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민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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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541년(중종 36) |
몰년 | 1591년(선조 24) |
본관 | 의성 |
대표관직 | 성균관사성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아버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다. 김진의 다섯 아들 중 오남으로 당시 형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김씨오룡(金氏五龍)’으로 불렸다.
[활동사항]
김복일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학유, 전적을 역임하였다. 형조, 호조, 공조의 낭관을 지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지역을 잘 다스렸다. 경주교수가 되어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사예, 성균관사성,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김복일은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래로 평생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탐구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문집인 『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가 아버지 김진과 다섯 형제의 유문(遺文)을 정리한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문집 중 행장은 퇴계의 계문제자로서의 학자적 모습보다는 내외 관직 수행과 그 성과에 대한 해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사림적 관인으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산(龍門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5년(숙종 11) 김진과 다섯 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사빈서원(泗濱書院)이 세워지면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