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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561
한자 金炳宇
영어음역 Gim Byeong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79년연표보기
몰년 1936년연표보기
본관 안동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919년 안동면 2차 만세 시위에 참여한 김재성(金在成, 1897~1982)의 아버지로, 1879년(고종 16)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에서 태어나 1936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김병우풍천면 어담리에서 안동읍 화성동으로 이사하였다. 이사한 후 그는 안동교회를 다니면서 성서서점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들 김재성과 함께 1919년 3월 안동면 시위에 참가하였다. 안동면 만세 시위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1차는 3월 13일, 2차는 3월 18일, 3차는 3월 23일이었다. 이 가운데 김병우는 2차와 3차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안동면 2차 만세 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김병우를 비롯한 김익현(金翊顯)·김계한(金啓漢) 등은 서로 의논하여 3월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낮 12시 삼산동 곡물전(지금의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고, 이들은 안동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다가 3월 19일 0시 50분 무렵 2,500여 명이라는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자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인 군청, 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 안동면 3차 만세 시위는 안동군민이 대거 참가하여 오후 7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구속자 구출을 위해 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밀고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30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일로 인하여 김병우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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