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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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聖地-安東 |
영어의미역 | Sacred Ground of Independence Movement, An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희곤 |
[개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세계의 역사는 하나의 커다란 대립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한쪽과 이에 맞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이라는 다른 한쪽이 부딪치는 구도였다. 침략국들은 입으로는 인도주의와 인류 공영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실제로는 약자를 무자비하게 장악하고 탄압하는 모순된 역사를 빚어냈다.
이 같은 제국의의 침략에 맞선 약소국의 노력은 반식민지 또는 식민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구국운동,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즉 독립운동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노력이자 식민지해방운동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조선 말기 의병 항쟁이 시작된 1894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의병 항쟁과 계몽운동 성격을 띤 구국운동으로 시작하여, 1910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해방운동으로 성격을 바꾸면서 쉼 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살펴야 한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
첫째, 독립운동사를 한민족과 일본 제국주의의 관계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독립운동은 한민족이 일제를 상대로 전개한 것이지만, 이것은 곧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짓밟는 제국주의를 상대로 인류의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의 저항이라는 세계적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 독립운동사를 한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타율적인 시각을 벗어 버리고 자율적인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일제를 물리치기에 우리의 힘은 부족했지만,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끈질기고도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점을 깊이 새겨야 한다.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이다. 이런 인식을 만드는 데에는 미국과 소련의 남북 점령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는데, 명백히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모두 점령군이었고 따라서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타율적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독립운동이란 민족의 피와 땀을 과소평가하고 오히려 반민족행위자가 설치는 현상을 막을 수 없다.
셋째, 독립운동이 세계 제패를 꿈꾸던 일제를 상대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한민족이 거주하던 모든 지역에서 전개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펼쳤다. 더구나 대한민국을 세우고 나라를 운영할 임시정부를 세워 26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독립운동을 펼친 민족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의 경우 독립운동은 대개 한두 해 정도 이어졌을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열강들은 이해관계에 묶여 한민족의 독립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침략 제국주의를 노래한 열강들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자세는 제국주의적인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넷째, 독립운동은 한국의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고 나간 빛나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근대화를 추구했다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었다. 군주제와 계급사회라는 과거를 극복하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성장시켜 근대사회로 이르게 만든 것이다.
[안동 지역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배경]
안동은 조선 말기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1894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51년 동안 쉼 없이 독립운동을 펼쳐 온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자정순국자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안동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 데는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첫째, 조선 후기 남인의 정치 행로가 막힌 뒤 학문 생활에 몰입하던 안동의 유림들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유림들은 주리론이 강한 성향을 따라 원리원칙에 집착하면서 정치적으로 문란한 정계에서 등을 돌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정계로 다시 진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기회는 안동의 분위기 그대로 대의명분에 걸맞아야 했는데,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펴는 일은 여기에 매우 합당한 일이었다.
둘째, 학문적으로 안동은 퇴계학맥이란 큰 틀을 갖고 있었다. 안동은 퇴계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퇴계로부터 학맥이 형성되면서 여러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세워지고 문집 발간을 통해 학문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다.
퇴계학맥의 규모는 매우 커서 안동 지역과 인근을 합친 안동문화권에서 문집을 남긴 인물은 400명을 헤아렸고, 이것은 바로 힘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도 유림의 여론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다. 전기 의병에서 김흥락(金興洛)과 류지호(柳止鎬)가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지명했던 경우가 한 예인데, 이 점은 계몽운동이나 농민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대지주가 없고 중소지주가 주류를 이루면서 지주 사이에 경제적 분화나 분열이 적었다는 점이다. 완전 지주는 0.01%로 전국 평균의 60분의 1, 경상북도 평균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전라도의 경우처럼 지주 계급이 대지주와 중소지주로 분열하고, 소지주가 대지주에게 항쟁하는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동학군 지휘자의 다수가 양반 출신이라는 최근 연구가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안동에는 동학과 관련된 격변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양반층의 자체 갈등이 비교적 약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대의명분이 강한 특성이 고질적인 대부호가 날뛸 만한 상황을 방지하기도 했다.
넷째, 안동 사회가 통혼권을 통해 양반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동성·동족 간의 결집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병 항쟁에서 계몽운동을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또 좌파와 우파를 가릴 것 없이 안동 지역의 독립운동이 문중적인 결속을 강하게 가진 배경이 되었다.
[안동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위상]
첫째, 안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독립운동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고,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일어난 갑오의병(甲午義兵)이다. 이후 안동은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안동은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시·군 단위 독립유공자 수는 평균 30명 안팎인데 안동의 독립유공자 수는 2009년 현재 321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더구나 포상되지 않은 인물 가운데 빛나는 투쟁 경력을 보인 인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아, 2009년 현재 확인된 미포상자는 700명을 넘는다.
셋째, 안동은 가장 많은 순절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1905년(을사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자결하여 일제에 항거한 인물은 전국적으로 약 70명에 이르는데, 그중 안동 사람은 김순흠·이만도·류도발을 비롯한 1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더구나 류도발·류신영 부자, 이명우 부부가 순절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이다. 영양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이 영해 앞 바다로 걸어 들어가 순국한 것은 스승 이만도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 정신이 안동문화권이 갖고 있는 민족정기와 선비 정신의 결정(結晶)이다.
넷째, 안동 지역의 독립운동은 의병 항쟁, 계몽운동, 3·1운동, 유림단 의거, 청년운동, 농민운동, 6·10만세운동, 공산주의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것이었다. 특히 경학사(1911), 백서농장(1914), 신흥무관학교(1919), 정의부(1925), 혁신의회(1928) 등으로 이어지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안동 출신 100여 세대가 망명함으로써 터전을 닦았다.
다섯째,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의병 항쟁 이후에 안동 사람들이 전개한 각종 항일 투쟁의 중심에는 혁신유림이 있었다. 의병 항쟁 이후 많은 유림들이 처사를 자처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지만, 안동의 유림들은 자기반성과 자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혁신유림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진보적이고 통일 지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류인식(柳寅植)이 동지들과 협동학교(協東學校, 1907)를 세워 안동 유림 사회가 보수에서 혁신으로 전환하는 물꼬를 튼 일,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열린 독립운동가 대표자 회의인 국민대표회의(1923)에서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선출한 사실, 임시정부가 내각책임제를 도입하고 초대 국무령(國務領)으로 이상룡(李相龍)을 선출(1926)한 사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안동 출신 지도자의 위상을 말해 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에도 어김없이 안동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이들은 대개 유산자이자 지배 계층 출신이지만,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였다. 제1차 조선공산당의 집행위원장이던 김재봉(金在鳳),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권오설(權五卨), 광복 후 독재자 이승만을 처단하려 했던 죄로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김시현(金始顯),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金祉燮),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등은 그러한 반열에 드는 인물이다.
[안동 지역 독립운동의 특성]
안동의 독립운동사는 세계사 차원에서 볼 때 ‘유교 문화권의 식민지해방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주도 세력이 대부분 유학자들이거나 그 바탕 위에 성장한 인물들이었고, 행동과 사고 양식도 그러했다는 데 있다. 51년 동안 이어진 독립운동사 한복판에 있는 3·1운동에서 기독교가 참여한 부분과 해방 직전 안동농림학교의 조선회복연구단 활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영역이 유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의병 항쟁에서 유림이 앞장선 것은 당연하고, 계몽운동도 혁신유림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정 순국은 특히 유림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10년대 대한광복회 활동, 만주 지역 독립운동, 만주 지역 독립군 기지 지원 활동, 1920년대 의열 투쟁, 1차·2차 유림단 의거, 심지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까지 유림과 유학적 지식인의 주도로 펼쳐졌다.
둘째, 안동에서는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도 유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림 지도자의 지향성과 지도력이 철저하게 작용하여, 스승과 제자의 연결과 학맥이 독립운동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엮어 가는 중요한 줄기였다. 망명지에서도 안동 학맥이 독립운동가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틀로 작용했다.
셋째, 사상적인 면에서도 안동 독립운동은 유학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위정척사사상 단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그 틀을 깨는 혁신유림의 등장은 안동 독립운동사에서 ‘1차 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안동문화권의 사상적 혁명을 달성해 나간 인물이 모두 퇴계학맥을 잇는 중심축에 서 있었고, 제2의 혁명이라 평가할 만한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 문제 해결 노력에서도 퇴계학맥을 계승하는 인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상룡이 사회주의를 유학적 토대 위에서 해석하고 민족 문제 해결 방안으로 수용한 것이나, 김재봉이 유학적 바탕 위에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인 것에서도 그러한 면이 발견된다. 그 때문에 안동 사람들을 일컬어 ‘갓 쓰고 공산주의 운동한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안동의 독립운동은 철저하게 유교 문화권의 역사적 바탕 위에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을 하나의 모델로 개념을 규정하고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은 안동 사람이 펼친 독립운동을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의 한 유형으로 개발하고 정리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이 되기도 한다. 안동 사람이 펼친 독립운동을 한 지역의 특성을 넘어서서 한국 독립운동사를 구성하는 한 영역의 특성으로, 더 나아가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라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개념화하고 성격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즉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고 특성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