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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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厚秉 |
영어음역 | Gim Huseong |
이칭/별칭 | 인맹(仁孟),창암(蒼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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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874년 |
몰년 | 1954년 |
본관 | 의성 |
대표경력 | 조선교육회 이사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후병은 1874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청계 김진(金璡)의 후손이다. 1954년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방정산에 있다.
[활동사항]
김후병은 1907년 안동의 혁신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세운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8년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여 교육 진흥을 위한 활동을 펼쳤고,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광복회(光復會)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20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이사로 선임되었고, 정인호(鄭寅琥) 등의 주도로 조직된 구국단(救國團)에 가입하였다.
또한, 김후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 후보자를 추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0년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22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고초를 겪었다. 옥고를 치른 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경성지방부(京城地方部)의 발기 모임에 참여하는 등 교육 구국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 안동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