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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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冕熙 |
영어음역 | Ryu Myeonhui |
이칭/별칭 | 류호백(柳虎伯),유면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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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
성별 | 남 |
생년 | 1906년 |
몰년 | 1944년 |
본관 | 전주 |
대표경력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1906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서 태어났다. 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번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활동사항]
1926년 류면희는 당시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참여하였다가 안동 출신 이선호(李先鎬)로부터 순종 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출신인 권오설(權五卨)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이선호와 함께 동교생인 임종업(林鍾業)·이현상(李鉉相) 등을 포섭하고, 이들에게 국장 당일 살포할 격문 및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다.
거사일인 6월 10일 류면희는 이선호·임종업·이현상 등과 함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 행렬을 봉송하고 난 뒤 학생들의 행렬 앞으로 나아가 각기 휴대하고 있던 격문을 살포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월 20일 6·10만세운동 학생주동자 11명과 함께 기소되어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