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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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洸鎬 |
영어음역 | Yi Gwang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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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885년 |
몰년 | 1942년 |
본관 | 진성 |
대표경력 | 예안면사무소 서기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성(眞城). 1885년(고종 22)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1942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이광호는 1919년 당시 예안면사무소 서기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펼쳐지자, 그는 이것을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안동의 3·1 만세 시위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이광호는 안동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이 최초로 만세 시위를 일으킨 3월 17일 예안면 1차 만세 시위를 계획·주도하였다.
이광호는 3월 11일 밤 9시 예안면사무소 면장 신상면(申相冕)을 비롯한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 등과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인쇄·제작하였다. 드디어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이광호는 이동봉(李東鳳)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리면서 만세 시위의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예안주재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 시내로 들어가 3월 18일 안동면 2차 시위에 합세하였다. 이때 이광호는 시위 군중을 지휘하며 만세 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광호는 예안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1921년 12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20원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