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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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灒逸 |
영어음역 | Im Chanil |
이칭/별칭 | 임상열(林尙烈),국삼(國三),송원(松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류현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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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
성별 | 남 |
생년 | 1895년 |
몰년 | 1972년 |
본관 | 울진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임찬일(林灒逸)은 본관이 울진(蔚珍)이고, 이명(異名)은 임상열(林尙烈)이다. 자는 국삼(國三)이며, 호는 송원(松園)이다. 1895년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서 태어났으며, 1972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안동시 임하면 오대2리 뒷산 나천곡에 있다.
[활동사항]
임찬일은 1914년 임하면 금소리에 설립된 금양의숙(錦陽義塾)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임득연·임범섭 등과 고종의 국장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면서 임하면 시위를 준비하였다. 귀향한 뒤 김원진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독립선언서」 준 다음 동지 규합에 나섰다. 3월 21일 노말수·임윤익·손응돌 등과 함께 금소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임하면소재지인 신덕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 군중들과 함께 경찰 주재소와 임하면사무소로 몰려가 서류를 파기하고 기물과 건물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의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임찬일은 1919년 9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