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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884
한자 改新敎
영어의미역 Protestant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집필자 김철호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설]

개신교는 캘빈의 장로교, 웨슬레의 감리교를 축으로 그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성서 해석상에 있어 개신교는 일치된 교리로서 교권 해석을 원칙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양심의 자유를 원칙으로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개신교는 자유로운 신앙적 선택을 할 수 있음에 따라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결성하였고 그 결과 많은 교파가 파생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 루터교, 성공회, 성결교, 침례교, 안식교, 구세군 등 다양한 교파가 파생된 것도 이러한 신학상의 배경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의 교파는 500여개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최근 교파의 지나친 분열을 반성하고 새로운 통합을 이루고자 교회 일치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정식 입국 이었으며 의사 알렌(Horace N. Allen)[1858~1932]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 본부의 지명을 받고 1884년 9월 14일 본국 선교 본부의 지시에 따라서 9월 20일 제물포에 당도하였다. 알렌은 9월 22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그의 직함은 미국 공사관 전속 의사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북장로교 선교사들보다 8년 늦게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한국에는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도착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였다. 이뿐 아니라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도 도착함으로써 한국 선교는 자칫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교파주의를 전파할 위험까지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슬기롭게도 각 교파는 본국 선교 본부로부터 네 개의 장로교가 서로 하나로 합동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음으로써, 1893년 1월에 ‘장로회 선교 공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 공의회는 각 선교회에 대한 치리권은 없었지만 다만 선교회 상호간의 전도 보고, 토의, 친교 등을 주목적으로 하면서 동시에 각 교단 선교회의 상회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기에서 선교 구역을 분할하기로 결정하고 미국 남 장로회는 전라도·충청남도·제주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미국 북장로회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경상북도·충북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미국 북감리회는 평북·영변·박천·평남·강원 남부·충남 지역, 미국 남감리회는 해주·인천·강원도 북부 지역, 침례교는 충청도 그리고 미국 북장로회와 감리교는 인구 5,000명 이상의 지역에는 두 교파가 함께 선교할 수 있지만, 그 이하 지역에서는 먼저 선교를 실시한 교파가 우선토록 지역 분할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역 분할 후에도 관리가 여의치 않자 1909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파송된 선교사 수에 의하여 선교 구역을 분할할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으며 이때 강원도 지역은 감리회에 속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각 지역은 특정 교파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도시의 경우에는 여러 교파가 동시에 선교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특정 선교부 만이 진출하도록 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경북 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 구역으로 할당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지역에서는 장로교가 뚜렷한 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변천]

칠곡군에 기독교가 전래 된 지도 이제 100년이 넘었다. 대구에 개신교를 처음 전래시킨 선교사는 배위량 선교사와 안의와 선교사다. 배위량(裵偉良)[본명 William Martyn Baird, 1862~1931]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1862년에 미국 인디애나 찰스타운에서 태어나 1888년에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1891년 1월29일 부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면서 1892년 11월에 부산 영선현교회[현 초량교회]를 설립하였다. 배위량은 1893년 4월 17일 경상도 지방을 순회·선교 할 목적으로 부산 동래를 거처 밀양·청도·대구·상주·안동·의성·신령·영천·경주·울산 등지를 1개월 여간 순회 한 후 부산으로 돌아갔으며, 순회 기간 중에 1893년 4월 22일 대구에 도착 수일간 머물면서 대구가 경북 지역의 선교 기지로 적합한가를 돌아보고 대구를 떠난 후, 그 이듬해 재차 대구를 방문하여 대구가 인구의 밀집 지역이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 지역으로 선교 기지로서의 여건이 적합하다는 것을 미국 해외 선교부에 보고하였고, 그로 인해 1895년 11월에 북장로교 대구지부를 개설하게 되었다. 1896년 4월에 배위량 선교사는 대구선교부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12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 교육담당 고문으로 임명받아 서울로 떠났고 그 후임으로 배위량 선교사의 처남인 안의와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안의와(安義窩)[본명 James Edward Adams, 1867~1929] 선교사는 대구 지역의 장로교의 개척자로 1897년에 대구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창설자이며 1906년 10월에 교회 구내에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대구·경북 지방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한 선교사로 주로 경산군·영천군·달성군·청송군 등지에서 활동하며 사역하였다.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애나주 맥코이에서 태어나 1894년 메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 5월 29일에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배위량 선교사의 후임으로 대구선교부로 임명을 받았으나 한국어를 습득하기 위하여 즉시 부임하지 못하고 1897년 11월 1일에야 대구선교부에 부임하여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부해리 선교사는 1874년 10월 26일에 미국 뉴저지주에서 아버지 제임스 브루엔(James Dehart Bruen) 목사의 차남으로 출생, 1892년에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디미’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가 되든 해인 1896년에 프린스톤(Princeton)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99년에 뉴욕의 유리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1899년 5월 1일에 대구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1899년 10월 26일에 대구선교부 세 번째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대구제일교회 당회원으로 있으면서 1903년에는 제2대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02년 5월 부해리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傅馬太)[본명 Martha S. Bruen] 여사가 대구에 부임하여 대구제일교회 구내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킨 것을 시작으로 대구신명여자소학교[현재 종로초등학교]를 개설하여 1900년에 설립한(남자부) 대남학교와 같이 경북 지방 최초의 신교육 학교가 되었고, 1907년 10월에 신명여학교를 설립하여 부마태 여사가 교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기여하였으며, 그때 설립한 신명여자중학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구 지역의 명문학교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마태 여사는 1930년 10월에 신병으로 55세로 사망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4년에서 1916년 사이 나환자 선교위원의 직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으나, 주로 그 시기에 경북 서부지방 선교에 심혈을 다하여 1901부터 1923년 사이에 경북 서부지방의 선산군(善山郡)·김천군(金泉郡)·칠곡군(漆谷郡)·상주군(尙州郡)·군위군(軍威郡)·성주군(星州郡) 등 6개 군을 중심으로 순회 선교를 한 결과 곳곳에 전도의 불길이 확산되어 많은 곳에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으며, 『경북교회사』,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경북노회 100회사』에 의하면 무려 57개 처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기독교가 황무지와 같은 경북 복음을 전파하여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인고의 노력과 희생적인 소명감으로 선교에 임하였는가는 가의 짐작이 되며, 오늘날 이 지역의 교회가 부흥 성장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부해리 선교사가 뿌린 씨앗의 열매라 하겠다. 부해리 선교사의 선교 활동 중에 남긴 일화 중에 부해리 목사가 선교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니며 전도를 하였는데, 당시 대구 지방에서는 처음 보는 자전거를 안경 말이라 부르며 신기하게 여겨 자전거를 타고 시골 마을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만져 보기도 하였는데 부해리 선교사는 “우리나라에는 이런 놀라운 기계들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쓸모없는 막대기를 숭상하는 사람은 막대기가 되고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 있는 사람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부해리 목사는 ‘마이크’라는 사냥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부해리 목사가 간혹 전도를 나갈 때 데리고 갈 때도 있었는데, 이 때 마을 사람들은 키가 크고 몸에 털이 많이 나고 눈이 파란 서양 사람도 구경스러웠지만 우리나라 토종개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서양개가 더 구경스러워 사람들이 몰려들면 부해리 목사는 성경을 펴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전도를 하였다 한다. 부해리 목사는 다년간 경상노회의 임원직을 맡아 수고하였으며, 1913년과 1914년에는 경상노회 7·8대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대구 YMCA의 전신인 교남 기독청년회를 조직하는데 발기인 선교사(부해리, 방혜법, 별추리)의 한 사람으로 대구지구 청년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설립하여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목회를 통하여 많은 심령들을 구원받게 하였다. 1941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기까지 40년을 한국 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는 1944년에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1959년 3월 26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에서 85세로 사망하였다.

칠곡 지역에 선교사 공의회 시대인 1901년부터 1906년까지 교회 설립 현황을 보면 부해리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는 5곳이며 어도만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가 2곳이다. 또한 권일두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는 3곳이며 한국인 목사가 설립한 교회는 박덕일 목사가 설립한 교회 2곳, 김충한 목사가 설립한 교회가 1곳, 정재순 목사가 설립한 교회 2곳, 김원희 목사가 설립한 교회 1곳이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1년에 죽원교회[금릉], 송천교회를 시작으로 1903년 상모동교회[선산], 1904년 황금정교회[김천], 오계동교회[선산], 노상교회[선산] 그리고 칠곡에 왜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금릉의 광기교회, 선산의 습례교회, 칠곡의 숭오교회황학교회를 1906년에는 복성동교회[현 약목교회]를 잇따라 설립하였다. 따라서 부해리 선교사 공의회 시대에 칠곡군에 장로교회 7개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6년까지를 독노회(獨老會)시대라 하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를 선교사와 한국 목사들의 ‘공동공의회시대’라 하는데 이때 세워진 교회로는 1911년에 세워 진 남율교회, 천평교회, 옥계교회 등이 있고 1917년에 신동교회가 설립되었다. 당시의 교통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적극적이고도 열정적인 선교 활동이었으며 복음이 상당한 속도로 확산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04년부터 1940년까지 칠곡군 내의 장로교회는 모두 16곳이었다.

1970년대 이후 새마을 사업과 산업화로 인해 기존의 주거 환경이 대단지 아파트 단지로 변화하면서 칠곡군 지역에도 많은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인근의 구미시가 거대한 공업 도시로 발전되면서 칠곡군은 주거 및 산업의 배후 도시로 변화하면서 농촌 지역이 쾌적한 신도시로 탈바꿈 하였고, 그 결과 인구는 2006년 12월말 현재 11만1천390명으로 도내 23개 시·군 중 구미, 경산과 함께 인구가 늘고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종교 지형에도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였다. 교회의 성격 자체도 기존의 농촌 교회들과는 매우 달라졌다. 대다수 교회의 설교나 예배가 신세대의 종교적 욕구와 취향을 반영하는 젊은 교회로 변화한 것이다. 이처럼 칠곡 지역에서 교회와 교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칠곡군 전체의 교인 수와 교회 수도 증가하게 되어 2008년 현재 약 70여개의 교회가 있다.

[현황]

현재 칠곡군 내 교회의 총수는 70여개인데, 장로교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군내 교회들은 거의 완전한 자유경쟁 원리와 개교회주의의 원리에 따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으며 규모에서 극심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교회로는 왜관교회, 북삼교회, 왜관제일교회, 약목교회, 숭오교회, 동명교회, 북삼제일교회 등이 있다.

[주요활동]

칠곡 지역은 거주민의 특성상 개신교의 대사회 선교 사업이 활발하지를 못했다. 지역 교회들을 표면적으로나마 대표하는 조직이 ‘칠곡군 기독교연합회’이다. 연합회는 군내 교회의 교역자와 장로를 회원으로 하고 있으나 한국 개신교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개교회주의로 인해 대표성에서는 상당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칠곡군 기독교연합회는 매년 초에 연합 부흥회를 통한 영적 재충전과 교회의 부흥을 계획하고 교역자 세미나를 통한 교단 간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부활절 연합행사, 성탄절 기념행사, 불우이웃돕기 운동 들을 펼치고 있다.

또한 교단을 초월한 칠곡군 장로연합회는 군내 교회의 장로들로 조직되어 매년 말이면 성가합창제를 개최하여 교단 간의 화합을 이루고 불우이웃돕기,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대 사회를 향한 사랑 실천운동을 펼치고 있다. 빈곤 노령 계층을 위한 무료 급식소인 ‘칠곡 사랑의 집’이 1998년에 왜관제일교회 및 관내 교회의 여성도들과 칠곡군의 도움으로 왜관시장을 찾는 어려운 노인들에게 쉼터와 점심을 제공해 왔다. 이후 칠곡군의 도움으로 2008년 같은 장소에 무료급식소를 확장하여 현대식 건물로 지은 후 지금도 양무리 선교회 주관으로 꾸준히 어려운 분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개신교 교회가 칠곡군에 세워진 지 100여년이 되었다. 그동안 개신교는 칠곡 지역에 근대 문명을 소개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민족운동의 통로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개신교는 칠곡군의 성장과 함께 온 군민을 아우르는 고유와 현대 문화 보급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구제하는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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