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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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文學紀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를 배경으로 탄생한 문학작품과 대표 문학관.
[개설]
대구광역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 등에 뛰어난 문학가를 여럿 배출하였으며, 20세기 후반까지도 중견·신예 문학가들을 상당수 탄생시켰다.
[대구에서 꽃핀 문학]
일제강점기에는 시로 저항하고 소설로 민족정신을 일깨웠으며, 1950년대에는 전후문학을 꽃피운 본거지가 바로 대구였다.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이육사, 박목월, 조지훈, 오일도, 백신애, 김동리, 유치환, 하근찬, 이오덕, 권정생 등이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하였다. 이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20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중견·신예 문학가들도 상당수이다.
대구의 현대문학은 1917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백기만, 이상화, 현진건이 프린트판으로 발간한 시 동인지 『거화』가 씨앗이 되고 1920년대에 태동하였다. 또 1920년대 시인 이상화, 백기만, 이장희와 소설가 현진건, 백신애, 아동문학가 윤복진, 서덕출, 이응창, 희곡작가 김영보 등이 대구문단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1945년 10월 출범한 죽순시인구락부가 창간한 동인지 『죽순』, 이육사 유고 시집 『육사시집』, 『청록집』, 이설주의 시집 『들국화』 등이 발간되면서 문단은 활기를 띠었다. 한국전쟁기 대구 문단은 한국 문단의 중심이 되었다.
[대구문학관]
2014년 10월 개관한 대구문학관은 문향(文鄉)인 대구광역시의 문학적 면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장소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들어선 대구문학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 중 3층과 4층에 있다. 3층은 ‘대구, 명작의 본향’, ‘작가와의 동행’ 등 대구의 문학과 관계있는 전시실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어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에서 꽃핀 문학을 시대순으로 둘러볼 수 있다. 4층은 ‘대구문학을 체험하다’라는 콘셉트로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다. 주로 지역 작가들의 책을 볼 수 있는 ‘문학 서재’, ‘기획전시실’ 등이 있다. 전시회도 종종 열리는데, 2020년 1월에는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대구문학관 홈페이지[www.modl.or.kr]를 방문하면 ‘대구문학 아카이브’ 메뉴를 통하여 대구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예지, 작품 등에 대한 정보를 살펴볼 수 있다.
대구문학관은 우선적으로 대구 시민들에게 지역 출신의 문학가와 지역 특색을 반영한 문학을 알리는 목적을 지니면서도 특정 작가의 기념관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즉, 대구문학관은 항일 문학과 전쟁문학 등 대구 지역의 정서를 반영하는 주제와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등의 작가들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대구문학관을 운영하는 대구문화재단은 문학관을 채울 콘텐츠를 수집하고 자료를 발굴하기 위하여 장시간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대구 시민들의 호응이 컸으며 지역 문인들과 작가의 유가족 및 지인들이 자료를 기증하거나 기탁하였다. 2014년 개관까지 수집한 자료는 문인의 초판 단행본 또는 작품이 발표된 문예지 등 서적류가 1만 1331권, 육필 원고나 소장품 등 기타 자료가 3,576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귀한 자료들도 수집되었는데 가령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발표된 1926년 문예지 『개벽』 70호나, 1925년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가 수록된 『금성』 3호, 이육사의 1946년 첫 시집인 『육사시집』, 김춘수의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같은 것이다.
대구문학관이 기획한 ‘문학로드’는 대구광역시 중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문학 공간을 따라가면서 작가나 작품을 매개로 문학의 현장을 재생하는 프로그램이다. 종이 위에서 활자로만 존재하는 문학이 아니라, 어느덧 지역민의 일상생활 공간 속으로 들어온 문학을 기억하는 문학 활동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대구문학로드는 A코스와 B코스로 나뉘는데, A코스는 대구예술발전소, 수창보통학교[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우현서루, 신동집 생가터, 현진건 처갓집 터, 이상화 생가터, 이장희 생가터, 청라언덕, 이상화 고택, 이상정 생가, 서상돈 고택, 이효상 고택, 신동집 고택, 김원일의 마당 깊은집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B코스는 대구문학관, 문성당출판사·합진인쇄소, 향수다방, 자유극장·송죽극장, 구상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린 꽃자리다방, 이육사가 명명한 청포도다방, 그랜드피아노가 있던 백조다방, 이효상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모나미다방, 신동집과 이중섭이 자주 만나던 백록다방, 시인 구상이 자주 찾던 술집인 대지바, 구상과 마해송이 자주 찾은 화월여관과 호수다방, 박용찬이 운영한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 264작은문학관, 이윤수가 운영하던 시계방 명금당, 이근무가 차린 무영당서점·무영당백화점, 감나무집·영남일보 사옥 터, 대구근대역사관·종로경찰서·대구우체국 순으로 진행된다.
[문학의 성지, 대구 향촌동]
대구문학관이 있는 건물의 1층과 2층에는 대구광역시 중구청 주도로 ‘향촌동 예스터데이’라는 이름의 전후 문화 재현관이 들어섰으며 지하 1층에는 음악 감상실 ‘녹향’을 재현하여 운영 중이다. 대구문학관을 둘러싼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은 6·25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불야성을 이룬 대구의 번화가이다. 6·25전쟁을 피하여 대구에 몰려든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향촌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전선문학’의 꽃을 피운 것이다. 구상,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오상순, 유치환, 양주동, 이육사, 이영도, 이효상, 서정희, 최정희를 비롯한 시인과 화가 이중섭, 아동문학가 마해송, 소설가 정비석, 작곡가 권태호, 김동진 등이 이에 속한다.
거리 곳곳에서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 음악가 김동진 등 예술인들의 아지트를 발견할 수 있기에 여기저기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이들도 포착된다. 향촌문화관은 예술 창작혼이 빛나던 1950년대 향촌동 거리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아울러 1950~1960년대 대구의 근대 시절을 재현하여 놓은 추억의 공간이다. 옛 시절 대구역을 비롯하여 교동시장, 당시 영화관, 음악 감상실 등 대구의 과거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였다. 옛 향촌동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2층 전시실에서는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을 따라 그려 보는 은지화 체험 공간이 있다. 향촌동의 다방들은 문학 창작과 작품 발표의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모나미, 청포도, 백조, 백록, 호수, 꽃자리 등 이름난 다방마다 뛰어난 문인들과 관련된 일화를 품고 있다.
2020년 대구문학관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 전시 ‘피란문단, 향촌동 꽃피우다’를 진행하였다. 전시는 3부로 나뉘어 ‘1부’에서 향촌동의 골목길을 배경으로 김동리, 마해송,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유치환 등 당시 대구로 피란 온 작가들의 모습과 글을 드로잉과 영상으로 전시하였다. ‘2부’에서는 예술인들이 교류하였던 당시의 다방 모습을 재현하고, 많은 문인이 찾았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의 모습도 재현하여 전시하였다. ‘3부’에서는 한국전쟁기 출간되었던 정훈 매체 등 군의 출판물과 피란 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2010년에 약령시 한의약 전시관과 종로, 진골목, 장관동 일원에서 ‘마당 깊은 집’ 축제를 개최하였다. ‘길남이·길중이와 함께 떠나는 마당 깊은 집 투어’,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스토리텔링 카페’, ‘마당 깊은 집 왈츠’ 등이 축제 기간 중에 함께 열리기도 하였다.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은 약전골목 모퉁이에 있는 작은 동네인데,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문화방송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마당 깊은 집』은 1954년의 대구가 배경이며, 당시 피란민의 생활상을 재현한 명작이다. 실제로 한국전쟁기 주요 피란지였던 대구는 피란민이 유입됨에 따라 단기간 동안 인구가 폭증하여 도시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다. 우선 주택이 부족하다 보니 집집마다 피란민 한두 가구가 세 들어 사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신천 변과 변두리의 야산 곳곳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교동시장인 ‘양키시장’과 동성로, 송죽극장, 대구역, 중앙통, 향촌동 등 도심 일대에서는 지게꾼, 상이군인, 거지, 나병 환자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대구광역시 곳곳에 전쟁의 상처가 들어와 있었던 셈이다.
대구광역시는 김원일의 문학작품 『마당 깊은 집』이 가진 원전의 의미를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와의 결합을 통하여 가치 있는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마당 깊은 집』을 통하여 ‘대구’라는 도시는 6·25전쟁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대구 일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리적 공간을 콘텐츠화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도 역사적 사건과 의미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0대 전업 작가인 ‘길남이’가 과거 마당 깊은 집에 살던 열세 살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 『마당 깊은 집』에서 길남이의 이야기는 동시에 작가 김원일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작가와 가족이 살았던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소설 속 인물들이 오갔던 골목이 남아 있다. 1988년에 출간된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을 읽은 독자들이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에 있는 마당 깊은 집의 터, 진골목, 신문팔이에 나선 길남이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품, 약령시장, 대구 도심의 교동시장과 종로거리, 군방각 등 작품 현장을 방문하는 ‘마당 깊은 집’ 투어가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계산성당 근처에는 『마당 깊은 집』을 기념하는 공간인 ‘마당 깊은 집 문학관’도 있다. 문학 체험 전시 공간인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소설 배경과 등장인물 관련 자료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곳이다. 마당 깊은 집 모형, 등장인물 소개, 1950년대 대구의 풍경과 생활상을 보여 주는 사진, 김원일 작가의 기증 도서들을 전시한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다. ‘대구’라는 공간을 통하여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읽어 나가는 작업은 대구를 문화도시로 재창출하는 동시에 근대 건축물의 스토리를 현재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문학기행을 기획·운영하고 있는 일본 도쿄의 쿠온 출판사는 2019년 10월 19일부터 4일 동안 대구광역시를 방문하였다. 25명의 일본인 방문단은 2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인, 출판인, 미디어 관계자 등 각계각층에서 모였다. 대구광역시는 근대 문화유산이 다양하게 간직되어 있고 특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의 무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2007년 설립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쿠온의 대표 김승복은 ‘대구문학기행’을 통하여 대구광역시가 보유한 문학적 자산을 일본어권 독자들에게 알리는 데에 주력하였다.
[264작은문학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1904~1944]는 안동에서 태어났는데 이육사의 형제들이 대구로 이사한 것은 1920년경이었다. 당시 이육사는 16세로 대구의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육사는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 생활을 하였는데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 해당하는 장소다. 신문기자라는 신분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이 사회 활동을 합법적으로 하는 데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육사는 1927년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벌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최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일본 경찰이 중외일보 대구지국을 포위한 채 이육사를 검거하였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이때의 수인번호 ‘264’번에서 온 것이다. 1930년에 이육사는 ‘대구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정치평론을 발표하였고 이후 몇 년간은 대구에서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며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7년 33세에 서울로 가족들이 이사를 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17년 동안 문학 및 항일 활동을 하였던 이육사는 젊은 날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지낸 것이다. 이육사는 항일운동으로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에 드나들었다.
이육사의 항일 정신과 문학을 기리는 작은문학관이 대구광역시에 있다. 중구 대안동 작은 골목 안에 세워진 264작은문학관은 경북대학교 박현수 교수가 개인 재산을 들여 만든 곳이다. 이육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박현수 교수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하였는데, 2016년 5월에 북성로 공구골목 가까이에 있던 1930년대 일본식 가옥을 2층 목조 문학관으로 탈바꿈시켰다. 1층은 소모임을 가질 수 있는 기획 전시실과 카페, 2층은 이육사 시인과 관련된 자료를 두루 망라한 상설 전시실로 운영하여 왔다. 더불어 전시물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박현수 교수는 「한 권에 담은 264작은 문학관」 안내 책자를 직접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인 이옥비는 ‘264작은문학관’ 상량식에 참석하여, 기념관에 사용될 대들보에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의 시구를 적기도 하였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인 이육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 박현수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학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육사라고 판단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264작은문학관을 설립하였다. 264작은문학관은 누구든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문학 콘텐츠 공유의 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전시 위주의 문학관이 아닌, 강연과 소모임, 시 낭송 등 다양한 문화를 기획하여 왔다. 대구 사람 이육사에 대한 무관심이 안타까웠던 박현수 교수는 살던 집을 팔고 빚을 내 3억 원 넘게 썼지만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다. 박현수 교수는 대구광역시와 중구청에 문화 해설이나 자원봉사 등의 인력 지원이 가능한지 문의하였지만 사유 시설이라는 이유로 지원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이육사가 동료와 주고받던 편지와 친필 시, 사진 등 50여 점과 시집 10여 권이 전시되어 있던 264작은문학관은 장기 휴업을 거듭하다가 2019년 폐관하였다.
[현진건이 태어난 대구]
현진건[1900~1943]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아버지 현경운이 36세에 ‘대구부주사판임관’을 제수받아 대구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현진건은 대구 중구 계산동 일대에서 성장하며 서당에 다녔고 아버지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노동학교에 다녔다. 현경운은 근대 대구의 계몽운동 시기의 중심적인 인물로 부각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현진건은 근대화와 함께 신문명과 신학문에 대하여 이해하고 세계정세에 일찍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셋째 형인 현정건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출옥한 지 반년 만에 사망하였기에 현진건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남달랐다. 현진건은 1915년 대구에서 이순득과 결혼하고, 서울을 거쳐 일본과 중국 유학을 가기 전까지 호적상 대구를 본적지로 두었다. 1917년 귀국한 현진건은 대구에서 이상화, 백기만, 이상백과 함께 대구 지역 근대문학을 싹틔운 첫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대구 생활에 대한 기억은 현진건의 소설에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현진건은 1920년 11월 「희생화」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는데 「희생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구 사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내가 어지도 올라카고, 아레도 올라켓지마는 올라칼 때마다 동무가 차자와서 올 수가 잇서야지”[『개벽』, 1920]라고 하였는데, 대구에서 쓰는 경상도 사투리가 전면화된 것이다.
1921년 1월 대구광역시 출신의 젊은 소설가 현진건은 『개벽』이라는 잡지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였다. 가난한 아내라는 뜻의 ‘빈처’는 한국문학사에서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불리며, 무명 소설가였던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후로도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의 단편소설과 장편 『무영탑』 등을 쓰며 대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소설가이면서 기자였던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 부장으로 일하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일로 체포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현진건은 이상화, 이장희와 함께 대구문학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해마다 현진건문학상을 공모하는데 매일신문사와 현진건문학상운영위원회가 주최하고 대구소설가협회가 주관하며 대구광역시와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이 후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