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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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兌鍊 |
영어공식명칭 | Kim Taeryeon |
이칭/별칭 | 김주현(金周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1월 25일 - 김태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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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태련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8월 19일 - 김태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태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묘소 | 국립신암선열공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27-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남산교회 조사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태련(金兌鍊)[1879~1943]은 남산교회 조사로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김주현(金周鉉)으로도 알려졌다.
[가계]
김태련은 1897년 1월 2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김용해(金湧海)가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태련은 개신교 신자로서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남산교회 조사(助事)를 맡고 있었다. 1919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으로부터 대구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는 제의를 받고 이만집의 제의에 동조하였다. 이후 김태련은 이만집·정재순을 비롯하여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하며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경 서문시장에 7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자 먼저 이만집이 만세 시위에 대한 연설을 하였고,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대구 성경학교·남산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서서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날 시위에 함께 참여한 아들 김용해는 일본 군경에서 심한 폭행을 당하여 3월 29일에 순국하였다.
김태련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태련은 1943년 8월 19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태련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태련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