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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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南埰 |
영어공식명칭 | Baek Namch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1월 1일 - 백남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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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백남채 대구 계성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백남채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백남채 희도보통학교 설립하고 이사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백남채 대구 지역 학교평의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백남채 제헌의원 당선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10월 5일 - 백남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백남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송림리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 |
거주|이주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58-6]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계성학교 교사|제헌의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백남채(白南埰)[1888~1950]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
백남채의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석천(石泉)이다. 아버지는 백용달(白龍達)이고, 어머니는 안순이(安順伊)이다.
[활동 사항]
백남채는 1886년 1월 1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서 태어나 대구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였다. 계성학교 졸업 후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협화대학(協和大學)에 유학하였고, 1918년 모교인 계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2월 24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은 경상도 지방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등과 접촉하였다. 2월 26일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문진(金文珍)이 대구로 특파되었다. 이후 이만집은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을 비롯한 개신교 관련 인사들과 계성학교 교사들을 만나 만세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는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을 설득하여 동참시켰으며, 계성학교 학생 심문태(沈文泰)·김삼도(金三道)·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이영식(李永植)·이성용(李聖容)·박재곤(朴在坤) 등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3월 7일에는 계성학교 소사에게 부탁하여 이만집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백남채는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일제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구금되었다.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고,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0년 7월 출감하였다.
백남채는 출감한 뒤 대구요업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26년 김의균과 함께 희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대구 지역 학교평의원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는 과도입법위원, 과도정부 경상북도 내무부장, 한국민주당 대구지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대구 병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
백남채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58-6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백남채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