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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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文泰 |
영어공식명칭 | Shim Munt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심문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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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심문태 대구 계성학교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심문태 대구 서문시장 만세시위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심문태 복음농업실수학교 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심문태 마산 창신중학교 교장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78년 - 심문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심문태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봉산리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
학교|수학지 |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58-6] |
성격 | 독립운동가|교육자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복음농업실수학교 교장|창신학교 교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심문태(沈文泰)[1895~1978]는 1895년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심문태의 아버지는 심춘화(沈春和)이고, 어머니는 김태월(金泰月)이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심문태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3월 7일 백남채는 학교 소사를 통하여 이만집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학생들에게 전달하였고, 심문태는 박태현(朴泰鉉) 등과 함께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만세 시위 때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8일 심문태는 김삼도(金三道)·정원조(鄭元祚)·박태현 등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심문태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심문태는 1922년 7월 경상남도 거창군의 거창기독청년회[거창YMCA]에서 “그 젊은 시절이여[其靑年이 誰耶]”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등 1920년대 이후에는 함양 인근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에는 호주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 호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36년 돌아왔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복음농업실수학교(福音農業實樹學校)에서 교장을 역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48년 9월 마산 창신중학교[현 창신고등학교] 5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마산 희망촌교회에서 일하다가 1970년 5월 퇴직하였다. 심문태는 1978년 사망하였다.
[묘소]
심문태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58-6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심문태의 공적을 기려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