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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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相敦 |
영어공식명칭 | Seo Sangdon |
이칭/별칭 | 서상돈(徐相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11월 10일 - 서상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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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3년 - 서상돈 경상남북도 검세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서상돈 대구 광문사 부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월 29일 - 서상돈 국채보상운동 제의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5월 - 서상돈 협성학교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13년 6월 30일 - 서상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서상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구 광문사 부사장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기업인이자 민족운동가.
[개설]
서상돈(徐相敦)[1851~1913]은 대구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다.
[가계]
서상돈의 아버지는 서철순(徐哲淳)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서상돈(徐相燉)으로도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서상돈은 1851년(철종 2) 11월 10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박해를 피하여 온 가족이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1871년 무렵에는 대구에서 지물상과 포목상을 운영하였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서양인과 교류하면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3만 석의 대지주가 되었다. 1902년에는 대구전보국 사장 조중은(趙重恩)과 더불어 양잠회사를 설립하여 칠곡군에 뽕나무 2만 1000주를 심기도 하였다.
1903년 서상돈은 내장원의 경상남북도 검세관(檢稅官)에 임명되었다. 검세관이 된 서상돈은 내장원에 경상도의 조세액을 선납하고, 각 군에 고용인[차인 혹은 객주]을 보내 조세를 징수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미곡과 지물 등 각종 물품을 사고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1904년 고용인들이 조세로 거두어들인 공전(公錢)을 유용하여 상납을 지체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세관에서 해임되었다.
서상돈은 1906년 대구 광문사(廣文社) 부사장에 취임하여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계몽운동 단체인 인민대의소(人民代議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인민대의소의 설립 취지는 민지개발(民智開發)과 민권부식(民權扶植), 자치 및 자강을 통한 국권 확립 등이었으며, 지방 관청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내에 경상북도 각 군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던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기 위하여 특별총회가 열렸을 때 서상돈은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 환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 1907년 2월 21일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설립을 주도하였고, 담보금을 납입한 사람들에게 영수증을 만들어 주고 은행 적립금 통장을 관리하는 재무직을 맡았다. 금연상채회는 민중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를 조직하고, 의연금을 담당할 기구로 서문 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 보상을 위한 의연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언론 보도에 힘입어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이 한창이던 1907년 5월 대구의 유지들과 6,700여 환의 자금을 마련하고 경상북도관찰사 이충구(李忠九)의 도움을 받아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서상돈은 가톨릭 대구교구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다. 1903년 축성된 대구대성당 건립에 앞장섰으며,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남산동 자락의 종묘원 부지 1만 평을 무상으로 지원하여 교구관리소[현 천주교대구교구청]를 건립하였다. 1911년 6월 21일에는 천주교대구대교구에 주교 숙사와 임시사무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3년 6월 3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돈의 공적을 기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