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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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玄澍 |
영어공식명칭 | Lee Hyunju |
이칭/별칭 | Lee Hyeonj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개설]
이현주(李玄澍)[?~?]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고,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이현주는 1896년 경주군수를 역임한 관료 출신으로, 1906년 8월 대구에서 결성된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가 설립될 때 이현주는 의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공표하고 국채 보상에 필요한 모금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현주는 국채보상운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금연상채회가 1908년 8월 26일 서울의 경성지원금총합소에서 전국 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낼 때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대구 금연상채회는 전국 회의에 각 군의 국채보상운동 진행 여부에 대한 의견서와 수금 총액 및 보관처를 정리하여 참석할 것을 요망하였다. 하지만 대구 금연상채회가 제안한 전국 회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평의회가 국채 보상 의연금에 대한 조사에 나서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현주는 1907년 11월 협성학교(協成學校)의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9년 대구향교 직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09년 11월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