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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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埈 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구례길 108[가태리 584-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곽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개설]
곽준[1551~157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면(金沔)이 의병을 규합하자 평소에 친히 지내던 교분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호남의 길목인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중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곽이상(郭履常)·곽이후(郭履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안의(安義)의 황암사(黃巖祠), 현풍의 예연 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구례 마을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 안에 2기의 비가 유존하고 있다. 이 중 좌측의 비가 곽준의 신도비이고 우측의 비가 곽재우의 신도비이다.
[형태]
중수된 신도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다. 귀부 높이 24㎝, 너비 140㎝이고, 비신 높이 257㎝, 너비 89㎝, 두께 37㎝이다.
[금석문]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에 곽준 신도비의 탁본[일본교토 대학 소재]이 소개되어 있는데, 현재의 비문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다른 부분은 ( ) 안에 표시하였다.
전액에 '증 참판 존재 곽 선생 신도비(贈叅判存齋郭先生神道碑)'라 적혀 있다.
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하 내용은 국중웅의 판독과 김정민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증 참판 존재 곽 선생 신도비명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봉훈랑(奉訓郞) 행안음 현감(行安陰縣監)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존재 곽 선생의 신도비명: 서문을 병기함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 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 좌빈객 정경세(鄭經世) 짓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현풍 현감(行玄風縣監) 원임(原任) 홍문관 응교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강원 보덕 김세렴(金世濂) 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홍문관 부제학(行弘文館副提學)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김광현(金光炫) 전액(篆額)을 쓰다.
나라가 태평한 지 백 년 동안에 성(城)이 못으로 되돌아갔으며 서울과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뻐하며 전쟁을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갑자기 임진년[1592년]의 변고를 만남에 강물이 흘러넘치며 무너뜨리고 충돌하듯 왜적이 지나가는 성읍(城邑)들은 갈대 울타리의 구실도 하지 못했다. 삼도(三都)[경주·서울·개성]를 빼앗기고 종묘가 재가 되는 데 이르렀다. 자고로 전쟁의 화가 이보다 참혹한 적이 없었다. 유독 의지할 바는, 선왕의 예의(禮義)의 교화가 백성들의 마음속에 사무쳐, 무릇 사부(士夫)의 열(列)에 드는 자들은 모두 적을 따라서는 안 되며 군부(君父)를 배반해서는 안 됨을 알았다.
비록 강약에 있어 대적할 수 없어 겁에 질려 흩어졌으나, 끝내 한 사람도 문을 열고 적을 맞이하거나 적의 진지로 투항하는 자는 없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전장(戰場)에서 죽어 넘어지기까지 하는 자도 왕왕 있었는데, 이는 또한 역사상 드문 일이었으나 그 죽음이 갑작스런 혈기에 격동되었거나 혹 형세상 어쩔 수 없는 데에 다닥쳐 일어났다면 ‘살신(殺身)’이라 말할 수는 있겠으나 ‘성인(成仁)’이라고 말하기에는 모자라는 점이 있다. 이 점에 모자라는 점이 없는 사람을 찾는다면 손꼽을 사람이 몇 명 없는데, 안음 현감 곽 공이 곧 그 한 사람이다.
공이 황석산성을 지킬 때 현을 맡은 지 겨우 두 해였으나 은혜와 신의에 정성을 다했으므로 이미 백성들에게 믿음을 얻었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통로가 되므로 도적이 반드시 빼앗으려 할 것이며 마땅히 지켜야 할 곳으로 여겼는데, 공이 충실하고 강의(剛毅)하며 또한 아전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반드시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세 고을의 군사를 휘하에 소속시켜 그 통로를 막도록 하였다. 또한 공이 서생(書生)으로 병사(兵事)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을 시켜 전투를 돕도록 하였다. 공은 이에 성가퀴의 초소를 수리하고 식량과 무기를 모으고 사수할 계획을 하였다. 또한 백사림과 약속하여 성을 나누어, 공은 서남쪽을 지키고 사림은 동북을 지키기로 하였다.
이듬해 도적이 대대적으로 남쪽에서 공격해 왔다. 공은 몸소 독전(督戰)하여 주야로 게으르지 않았다. 사림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어 몰래 사람을 시켜 꿰어 말하기를 '도적이 성한 기세로 다닥쳤는데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공이 성난 목소리로 '나는 이미 죽을 직분이니 겁낼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사림이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을 알고 밤을 틈타 줄을 매어 처자를 성 밖으로 내려 보내고는 곧바로 수하(手下)의 병졸들과 도망하였다. 군리(軍吏)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백 공이 이미 도망하였으니 빨리 나가십시다'라고 함에, 공이 말하기를, '이놈이 거짓말로 사람을 미혹되게 하니 마땅히 참수(斬首)할 것이다'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니 성 동북이 텅 비었다. 이에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요동하였고 막을 수가 없었다. 자서(子壻) 및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청하기를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일찍 계책을 세우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성이 곧 내가 죽을 곳이다.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우리오?'라고 하며 군기(軍器)를 가리켜 말하기를 '적에게 도움이 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고 다 태우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도적이 성에 올라왔을 때, 공은 의연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으며 기색에 변함이 없었고, 마침내 해를 당했다.
아! 순리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成仁)’에 모자람이 없다고 말한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 성을 버리고 죽지 않으며 진영을 도망하여 작록(爵祿)을 누리는 자들이 흔함은 공이 익숙히 보던 바이다. 사림(士霖)이 끝내 군율(軍律)에 불복(不伏)하였음은 아이들도 아는 바다. 오직 의리에 따른 판단은 평소에 정한 바였으며 마음이 안주한 바는 직분에 따른 죽음에 있었다. 그러므로 사림을 도적과 개같이 보았으며 비와 번개같이 퍼붓는 포화와 칼날은 평소의 음식이나 옷같이 보아 두려워하지도 마음을 흩트리지도 않았다. 끝내 후문(後門)을 열지 않고 죽었으니, 아! 장하다.
대개 공은 도적이 깊이 들어온 이후로 국난에 죽을 것을 각오하고 집안의 여성들에게 모두 작은 칼을 지니도록 하며 말하기를 '불행한 일에 닥치면 이것으로 자결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순절하기 수십 일 전 벗들에게 주는 이별시에 '묘당(廟堂)에서 지난날 경전을 강론하였었지만, 오늘날 남아(男兒)다운 사람 몇 명인가? 바다 같은 피 흘러 비린내 천지에 가득한데, 직분에 임해 서로 힘쓸 것은 ‘성인(成仁)’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읽음에 늠연(凜然)히 생기(生氣)가 있다. 평소의 의지가 확고함은 이에서도 그 경개(梗槪)를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당시에 지각 있는 공을 아는 사람들은 황석산성의 함락을 듣고 크게 놀라며 실성하여 "아! [有明朝鮮國 奉訓郞行安陰縣監 贈嘉善大夫兵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存齋郭先生神道 碑銘幷序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兵曺參判行安陰縣監存齋郭先生神道碑銘幷序) 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 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 學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鄭經世 撰 (吏曹判書 鄭經世撰) 通訓大夫行玄風縣監原任弘文館應敎知製 敎兼 經筵侍講 官春秋館編修官 世子侍講院輔德金世濂 書 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 敎兼經 筵叅 贊官春秋館修撰官金光炫篆 (大提學 金光炫篆暮)
國家昇平百秊(年)城復于隍中外恬嬉忘戰已久猝遇壬辰之變如河流橫潰汜(汎)濫衝決所過城邑不能爲蕭葦之防遂致三都失守五廟成灰自古兵戎之禍未有慘於此者獨頼 先王禮義之化浹人心髓凢列于士夫者皆知賊之不可從君父之不可背雖堅脆不敵恇怯駭散而終無一人開門迎納詣壘授降者至於爲國捐軀橫尸戰塲者往往而有焉此又前史之所罕也然其死也(其死也-없음)或激於蒼卒意氣或迫於事勢窮蹙則可謂之殺身而于成仁有歉焉求其無歉於是者則指不能以屢屈而安陰縣監郭公卽其一也公之守黃石山城也爲縣僅二期(朞)而恩信惻怛已孚於民都體察使李公元翼以黃石爲湖嶺咽喉賊所必爭法當守以公忠實而剛毅且得吏民心必能守遂隷以三邑兵使扼其吭且以公書生不習兵令金海府使白士霖助之戰公乃修治哨堞積儲粮(糧)械爲死守計 且與士霖約分城以守公守西南士霖守東北明秊(年)賊大至門于南公躬督戰晝夜不懈士霖欲棄城走陰使人餂之曰賊盛而逼豈不怖㢤(哉)公厲聲曰吾已分死無怖矣士霖知不可說乗夜縋下其妻子卽與手下兵遁軍吏走報曰白公已逃速出公曰此奴訛言熒惑當斬使人視之城東此(北)空矣於是城中波折不可禁遏子婿及吏民等皆號泣以請曰事已至此願早爲計公笑曰此城乃吾死所何計之更爲指軍器曰不可以籍寇命悉焚之明日賊登城公毅然踞胡床神色不變竟遇害嗚呼不旣從容矣乎㥜(謂)之無歉於成仁者非耶當是時棄城而不死亡陣而享爵祿者前後相望公所熟見士霖之終不伏軍律亦童子之所知也唯(惟)其熊魚之辨素定於平日而心之所安在於死職故視士霖如盗賊大彘視雨砲電刃如飮食裘葛不懾不乱終不開後門以死嗚呼(乎)壯哉盖公自寇深以後以死難自許一家女婦等亦皆佩以小刀曰卽有不幸以此自決足矣前伏節數十日與友人別有詩曰廟堂平昔講經論此日男兒有㡬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勖在成仁至今讀之凜然有生氣其素定之堅確於此亦可槩矣是以當時有識之知公者聞黃石䧟莫不愕然失聲曰嘻]"
좌측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정(養靜)이 반드시 죽었으리로다. 양정은 구차히 살 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지절(志節)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그러리라 인식된 바가 이와 같았다.
공의 이름은 준(䞭)이고, 양정(養靜)은 자(字)이다. 대대로 현풍에서 살았다. 고조(高祖) 안방(安邦)은 익산 군수인데 청백(淸白)함으로 일컬어졌다. 증조(曾祖) 승화(承華)는 진사(進士)인데 한훤당(寒暄堂)[김굉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김종직] 문하에 출입하였다. 조(祖) 박(璞)은 일찍이 서울에 머물며 과거에 응시했으나 기묘년(己卯年) 화(禍)가 일어남에 자취를 감추고 남쪽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처형(妻兄) 윤풍형(尹豊亨)이 이조(吏曹)에 있어서 관직을 비정해 놓고 편지를 보내 책망하였으나 끝내 더럽혀지지 않았고 거의 화를 당할 뻔했으나 벗어났다. 고(考)는 휘(諱) 지완(之完)이고, 비(妣)는 초계 정씨 진사(進士) 옥견(玉堅)의 딸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의젓하게 어른스러운 국량(局量)이 있었다. 자라서 사우(師友) 간에 종유(從遊)함에 내심(內心)과 외물(外物) 간에 경중(輕重)의 분간을 알았으므로, 비록 어버이가 계서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실로 영달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어버이가 죽은 후 이에 다시는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않았다. 서실(書室)을 짓고는 ‘존재(存齋)’라 편액하고, 날마다 그곳에 머물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의심이 있으면 보다 나은 사람에게 질문하였고 열심히 공부하며 게으르지 않았다. 일체의 외물(外物)에 대해 태연하여 마음속에 들이지 않았다. 비록 처자가 얼고 굶주려도 태연하였다.
임진년에 김 공 면(沔)이 의병을 규합함에 공이 평소 친하게 지냈으므로 군막(軍幕)을 보좌하여 보익(補益)함이 컸다. 관찰사(觀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어짊을 듣고 군무의 노고를 문서로 올려 자여도(自如道) 찰방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년]에 전쟁의 기근이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여러 읍(邑)의 둔전(屯田)을 관리함에 정성을 다하여 경영하였으므로 수확이 매우 많았으며, 사람을 보전함이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 갑오년[1594년] 가을에 조정에서 재준(才俊)을 발탁함에[養靜其必死矣養靜非苟活者其志節之見必於人有如此者公諱䞭養靜其字也世爲玄風人高祖諱安邦益山郡守以淸白稱曾祖諱承華進士與寒暄同遊佔畢門祖璞嘗在都下應擧矣己卯禍作掃跡南歸杜門不出妻兄尹豊亨在銓地擬一官貽書誚之竟不爲所汙(汚)㡬及禍而免考諱之完妣草溪鄭氏進士玉堅之女公自少嶷然有成人局量及長從遊師友間知內外輕重之分則雖爲親在不免爲擧業實無榮達念親歿遂不復詣場屋築書室扁曰存齋日處其中專精硏究有疑則資之勝己亹亹不怠一切外物泊然不入心雖妻子凍餒夷如也壬辰金公沔紏合義兵公素相善佐軍幕補益弘多觀察使金公誠一 聞其賢以軍勞上除自如道察訪癸巳兵荒甚餓殍(莩)滿野公管諸邑屯田事悉心經紀得粟 甚多全活人不可記甲午秋朝廷拔擢才俊以不]"
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례를 뛰어넘어 공을 특별히 대우하여 안음 현감을 제수하여, 이곳에 부임하였다가 정유년[1597년]에 황석산성에서 죽으니 나이 47세였다. 공이 죽음에 아들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공을 끌어안고 적을 꾸짖으니 적이 아울러 칼로 쳤다. 딸은 남편 류문호(柳文虎)를 따라 성밖으로 달려 나가다 남편이 적에게 사로잡히자 곡하며 말하기를 '아버지를 버리고 나온 것은 남편을 위해서였는데, 남편이 잡혔으니 어찌 살리오?'라고 하며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다. 모두 공의 가르침과 선으로 인도함에 따라 이렇게 함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조정에 올려짐에 선대왕(先大王)[선조]이 아름답게 여겨 모두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령하고 공에게 병조 참의를 추증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상과 이후는 모두 좌랑에 추증하였다. 광해군이 공을 참판에 추증하였고, 성상(聖上)[인조]이 반정(反正)한 초기에 또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수총인(守塚人)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수미(粹美)하였고, 성질이 순일(純一)하고 정성스러우며 충성스럽고 질박하였으며 평탄하면서 분명하였다. 겸손하여 부족한 듯하였으나 지키는 바는 견고했으며 타인과 거스름이 없었으나 취사(取捨)에 분별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일선(一善)과 일예(一藝)를 보면 성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며 반드시 장려하여 이룩할 수 있도록 해 준 다음에야 그쳤다. 향속(鄕俗)의 사람을 만남에 또한 한계를 짓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겁게 지냈으나 끝내 또한 지조를 잃음이 없었다. 집에 거처함에 행실에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형제와 화락하였으며 친족끼리 화목하였다. 자녀를 교육함에 반드시 효제정신(孝悌貞信)을 가르쳤고, 관혼상제(冠昏喪祭)의 예식은 반드시 예경(禮經)을 따랐다. 아! 이것이 지조를 죽음으로 지키고 도를 실천하게 된 근본이로다.
처음 전기원(全基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곧 이상과 이후이다. 딸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곧 류문호(柳文虎)의 아내이다. 모두 자식이 없다. 막내는 현감 강연(姜𨓯)에게 시집가서 3남 6녀를 낳았다. 뒤에 안수공(安守恭)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공의 초상(初喪) 때에 공의 동생 참봉 근(赾)이 엎드려 숨어 성(城)에 들어가 시신을 거두어 성 밖에 묻었다. 수개월 뒤에 현풍현 서쪽 화산(花山)의 선조의 묘 곁에 장사지냈다. 또 10년 뒤에 공의 벗 박 군 성(惺)에게 고하여 지석(誌石)을 묘 가에 묻고, 또한 그의 편지와 박 군의 묘지문(墓誌文)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중씨(仲氏)의 행적은 큰 절목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있으니 그대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상세한 것은, 박 군이 꾸미면서 실질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 묘지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의 한마디를 묘도(墓道)의 돌에 새겨 불후(不朽)의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오직 우리 그대가 도모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공의 불후(不朽)한 행적은 절로 충분히 우주를 진동시키고 천지에 두루 알려진 바이니, 어찌 드러내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이며 또한 어찌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유독 생각하기로 공이 일찍이 임명받아 권면하는 일로 누차 상주(尙州)에 왕래하였는데, 상주의 대부(大夫)와 선비들이 공의 덕(德)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입에 오르내리며 떠나지 않고 있다. 내가 그때에 충청도에서 호구(糊口)하고 있었으므로 만나지 못했다. 항상 아쉬움을 되씹으며 훗날 예를 올리고 교제를 정하기를 평생의 기쁨으로 여기며 바랐는데, 이미 공의 죽음을 듣고는 과거의 바램을 보충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으나, 공의 우뚝한 바를 우러름에 또한 강 가운데의 지주(砥柱)가 될 뿐만이 아닌즉 문득 눈물을 거두고 찬탄하였다.
선비는 진실로 세대를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교제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동시대에 있어서랴! 내가 공에 대해서는 다만 얼굴을 상면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참봉 군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것은 그 뜻이 반드시 이러한 데에 있는 것이니, 또한 어찌 무졸(蕪拙)함을 핑계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박 군의 묘지문을 발췌하고 사우(士友)에게 들은 것을 보태어 위와 같이 기록한다. 이어서 명(銘)을 붙이니,
호연(浩然)한 기운 천지에 가득 찬 것을 누가 받지 않았으리오마는/ 길러내지 못함이 근심이라/ 선비가 평소 의(義)와 인(仁)을 말하나 화복(禍福)에 겁내어 군친(君親)을 버리네/ 의(義)가 중한지 알지 못하고 다만 생명만을 크게 생각하니/ 앎이 어찌 미치지 못하겠는가마는 기(氣)가 쭈그러듦이 그 탓이라.
오직 공의 마음가짐은 강대(剛大)하고 곧아/ 죽을 곳을 앎에 화살이 표적으로 날아가는 것 같네/ 용감히 나아가며 돌아보지 아니하니/ 옛 용사 맹분(孟賁)·하육(夏育)도 그 의지를 빼앗지 못할 것이며/ 육체가 없어졌으나 이(理)는 온전히 절로 확립되어 결함이 없네/ 부자(父子) 4인은 삼강(三綱)의 동량(棟梁)이요, 옛 책을 살펴봄에 이보다 빛 날 손가?/ 어찌 저 불인(不仁)한 사람들은 공이 만용을 부렸다 하는가?/ 임지에서 죽으니 성군(聖君)이 포상한 바라/ 황석산(黃石山)은 우뚝이 남쪽의 기강이 되었는데/ 산이 평지가 될지언정 공의 이름 죽지 않으리.
숭정(崇禎) 7년[1634년] 5월 일 세우다[次待公授安陰縣以去丁酉死黃 石年四十七公之死也子履常履厚抱持公罵賊賊幷斫之女隨其夫柳文虎走出城夫爲賊所獲哭曰棄父出爲夫也夫被執何用生爲縊于尌以死皆公之敎誨式穀能有以似之也事聞先大王懿之命並(幷)旌其閭 贈公兵曺(曹)叅議遣官祭之履常履厚俱 贈佐(正)郞光海(廢)(主)朝加贈公叅判及(今)聖上反正之初(上卽位)又遣官致祭(軫其無後)特賜守塚人公天資粹美性貿醇慤忠厚檏實坦易明白謙若不足而操執固與物無忤而取舍辨見人有一善一藝誠心喜好必爲之奬成乃已遇鄕人俗子亦不爲畦畛與之由由而終亦無自失焉家居篤於行誼(義)事親盡其誠怡愉于兄弟睦婣于族黨敎子女必以孝弟貞信冠昏喪祭必遵用禮經嗚呼玆其爲守死善道之本歟初娶全基遠女生男二卽履常履厚女二長卽柳文虎妻皆無子季適縣監姜𨓯(遵)有三男六(五)女後娶安守恭女無子始公之喪公之弟參奉赾伏匿行入城收瘞于城外後數月葬之玄風縣西花山先兆傍又(없음)後十秊(年)諗于公之友朴君惺誌其竁間又以書及朴君誌(詩)來屬余曰吾仲氏之行其大者在人耳目子無不知其細者朴君非華而不常者觀於誌而可徵願得子一言刻石墓道使有以不朽惟吾子幸惠圖之余惟公之不朽者自足以霆轟宇宙與天壤俱弊奚待乎揄揚而又豈余之所及耶獨念公嘗以勸相沿牒屢往來于尙尙之大夫士無不悅公之德至今吃吃不離口余時餬(糊)口湖中未及際晤常茹恨在心尙覬他日得一執贄定交當懽(歡)如平生旣而聞公之死則宿昔之願不可得以償矣爲之澘焉以悲而仰公所立又不啻如中流(河)之砥柱則輙爲之収涕而擊節焉士固有曠世而神交者況同時耶余於公直面目不相接耳參奉君之所以屬筆於余者意必以是歟則又何可以蕪拙辭耶遂掇朴君之誌附以所聞於士友者叙之如右系以銘曰
有氣浩然充塞穹壤 人孰不受患不能養 士方平居說義說仁 禍福所怵或棄君 親 不見義重但見生大 見豈不及咎在氣餒 惟公所存剛大以直 旣見死所如矢赴的 勇注(往)不顧賁育莫奪 形毁理全自靖無闕(奚怨奚怛) 父子四人梁棟三綱歷觀載籍孰 此煒煌 何彼不仁謂公傷勇 死於封彊聖 所折衷 黃石之山(黃山之石) 屹爲南紀 使山若礪 公名不死
崇禎七年(甲戌)五(四)月日 (日立)]"
[현황]
비각의 북쪽에는 곽재우와 곽준을 배향하는 예연 서원이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비의 우측 면에 의하면 비는 1634년(인조 12)에 현풍읍 대리 솔례 마을에 세웠던 것을 곽재우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고, 6·25 전쟁 때 파손되어, 1957년 중수하였다고 한다. 『달성군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의 곽재우·곽준 신도비 설명에 의하면 누구의 비인지는 기술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보여지는 비편[높이 116㎝, 폭 48㎝, 후 38㎝]이 동쪽 담장 아래에 남아 있고, 귀갑(龜甲) 문양이 양각된 귀부 편[높이 110㎝, 폭 160㎝] 일부가 비각 서쪽에 유존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주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비각은 최근 새롭게 건립되었거나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담장은 없어졌다. 담장에 있던 남쪽 출입문은 담장 없이 비각 우측에 서 있다.
[의의와 평가]
곽준 신도비는 곽준의 생애와 임진왜란 때의 활약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예연 서원과 함께 곽준의 나라 사랑을 알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