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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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潘碩枰 |
영어음역 | Ban Seokpyeong |
이칭/별칭 | 공문(公文),송애(松崖),장절공(壯節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용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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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472년 |
몰년 | 1540년 |
본관 | 광주(光州) |
대표관직 | 형조판서|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이며, 호는 송애(松崖). 아버지는 반서린(潘瑞麟)이다.
[활동사항]
원래 재상가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반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글을 가르치고 아들 없는 부잣집으로 보내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관검열이 되고 1513년(중종 8)에 사간원정언·봉상시판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하였으나 노비 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중종 11) 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종5품으로서 경흥부사가 되고,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524년 (중종 19)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보고를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과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3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533년 다시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역임한 바 있고 또 문신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하였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40년(중종 35) 5월에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묘소]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조안리에 있었는데,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해산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에는 정사룡이 지은 묘갈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