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022
한자 敎育
영어공식명칭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금희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서 행해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

[개설]

가평군에는 2020년 5월 기준 취학전 교육기관은 유치원을 비롯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총 38개의 교육기관을 보유하고 있다.

유치원은 가평유치원을 비롯한 공립유치원이 13개, 청심유치원 같은 사립유치원을 1개 보유하고 있으며, 초등학교는 총 13개로 모두 공립학교이다. 목동초등학교의 경우 목동초등학교 명지분교를 운영하고 있다. 중등교육기관인 중학교는 총 6개로 공립중학교가 5개, 청심국제중인 사립중학교가 1개 설립되어 있다. 고등교육기관인 고등학교는 공립학교가 4개, 청심국제고인 사립고교가 1개로 총 5개의 고등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한편 가평군은 ‘평생학습도시 가평’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민들의 평생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가평읍주민자치센터, 가평보건소, 가평군 농업기술센터, 가평군 평생학습센터를 하나의 홈페이지로 통합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평생학습동아리 사업, 동네 학습공간 제공, 찾아가는 배달강좌, 성인문해교육, 도란도란학습마을, 성인장애인평생교육 등 다양한 평생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조선 시대 교육]

조선시대 가평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는 향교는 조선 초기의 향교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평은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어 가평현이 되면서 향교와 서원 및 서당이 설립되었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토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가평에 향교가 처음 설립된 것은 1398년(태조 7)이다. 현 가평읍 읍내리 50번지가평 향교가 설립되었고, 유생의 정원은 설립 초기에는 30인이었으나 중종 대에서는 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50명으로 증원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가평 향교는 유생에 대한 교학의 기능과 춘추 석전제를 행하면서 문묘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며 지방문화와 교학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가평의 서원은 17세기에 처음 설립되었다. 설악면 장석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조광조와 김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미원서원(迷源書院)과 1705년(숙종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1707년에 ‘잠곡(潛谷)’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한 잠곡서원(潛谷書院)이며 두 서원은 향교와 함께 향토사회문화와 교학의 중심으로 향토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가평지역의 서당은 동몽교육과 민중교육을 담당한 사설 교육기관으로 서당의 설립은 자유로웠으나 17세기 가평군에 설립되어 있던 서당의 수는 자료미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1910년 청평면 고성리에 양진서당이 설립되어 지방민 자제를 교육하는 등,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서당이 설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항기 교육]

개항기의 교육은 전통적인 유교교육과 서구식 근대교육으로 양분되어 진행되었다. 개항기 시기에 가평에서도 역시 근대교육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907년 군내면 객사리에 최초로 근대적 사립교육기관인 4년제 교육기관으로 가능학교가 설립되었으나, 통감부에 의해 민족계 사학을 탄압하면서 식민지교육으로 재편하게 하여 가능학교는 1910년 10월 4일에 가평공립보통학교[현 가평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10년 6월 15일에는 군내면 읍내리[가평읍 읍내리]에 기독교 조선감리회 여선교회에 의해 정희여학교(貞熙女學校)가 설립되었다. 정희여학교는 초등교육과정으로 2년제로 시작하였다가 4년제로 변경되었고 가평지역에서 유일한 여학교로서 여성들의 신교육을 담당하였으며 1934년 12월에 폐교되었다.

[일제 강점기 교육]

일제 강점기 초기, 가평에서는 1912년 상천리에 지역유지들이 신응의숙(信應義塾)을 설립하고 조명산 선생이 상천학술강습소라고 개칭하여 아동들을 교육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상천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 1918년 4월에는 방일리 유지들은 명교의숙(明敎義塾)이란 개량형 서당을 설립하여 4년제 초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후 명교의숙은 1935년 4월 미원국민학교 부설 방일간이학교로 발족되었다. 1919년에는 미원공립보통학교가 4년제로 개교되었으며, 미원공립보통학교는 1938년에 미원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4년제에서 6년제로 학년제 또한 변경되었다. 이후 1941년에 4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미원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30년에는 삼회리에 농흥의숙(農興義塾)을 설립하여 운영되다 1949년 8월 1일 수입초등학교 삼회분실로 변경 운영되었다.

식민지교육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가평에는 1919년 설악면미원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1923년 가평군 하면조종공립보통학교, 1928년 청평면청평공립보통학교, 1929년 북면목동공립보통학교, 1934년 상면상면공립보통학교, 1936년 가평면에 복장포공립보통학교가 모두 4년제 학제로 설립되었다. 가평공립보통학교를 포함하여 각 면별로 1개교씩 총 7개교가 설립되었다. 보통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마을에 교육 적령기를 넘긴 미취학자들을 위해 간이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 겸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는데 2년제로 주로 황국신민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가평지역의 경우 총 7개의 간이학교가 설립되었다. 1934년부터 1937년사이에 설립되었으며, 거림공립간이학교와 봉수공립간이학교가 1934년에 설립되었으며, 방일공립간이학교가 설악면에 1935년에 설립되었다. 1936년에 운악공립간이학교와 두밀공립간이학교가 동시에 설립되었으며, 1937년에 화악공립간이학교와 양진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침략중기까지 가평에서는 7개의 보통학교와 6개의 간이학교가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는 야학운동이 전개되면서 1920년 가을 북면 이곡리에 지방유지에 의해 개설된 노동야학과 1921년 9월에 가평에 엡윗청년회에 의해 가평엡윗부인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기의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침략말기 명칭이 변경되면서 가평군에는 국민학교 2개소, 간이학교 1개소, 분교장 1개교와 강습소 1개소가 신설되고, 8개교의 국민학교가 6년제로 승격되면서 초등교육기관이 확충되었다. 1938년 복장포심상소학교 부설 금대분교장을 신설하였다.

[광복 이후 교육]

광복 후 1945년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육계와 학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를 구성하여 한국인이 원하는 교육을 선택하도록 하였으며 명령 4호의 발표 이후 1945년 9월 28일 닫혀있던 각급 학교의 교문을 열어 공립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군정기 학국교육의 과제는 일제의 황국사관에 입각한 군국주의적인 교육 내용과 식민지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교육의 전통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육 정책에 가평지역도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1945년 9월 24일 18개의 국민학교[가평, 복장포, 마장, 미원, 방일, 청평, 상천, 상면, 조종, 목동]와 2개의 간이학교[분교장]가 일제히 교문을 열어 새롭게 교육과정을 진행하였다. 학교로 취학하는 많은 수의 학생들로 인해 3개의 분교장[대성, 도대, 위곡]을 신설하게 되고 1946년 대성학술강습소를 청평국민학교 부설 대성분교장으로 인가하였고, 가평명륜국민학교를 가평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또한 1946년 목동국민학교 부설 도대분교장과 1947년 미원국민학교 부설 위곡분교장을 신설하여 증가하는 취학 아동을 수용하는 등 지역 사회 교육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초기인 제 1공화국 초기 가평교육은 경기도의 교육시책인 일민주의사상 보급, 의무교육 추진, 일인일기 교육, 교원의 자질 향상 등을 구현하는데 초점을 두고 의무교육의 기회확대와 여건 개선 및 시설환경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실업교육을 진행하고, 실천과 기능을 중시하는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국민학교 5·6학년 아동에게 농업과 공업에 대한 실과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해방 전까지 가평에는 중등교육기관이 없었기에 한학급의 10%정도가 객지로 나가 중등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가평에서 중등교육기관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10월 감리교회에서 정의여학교 자리에 군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가평중학원을 개설하였다. 가평중학원은 정규 중학교는 아니었으나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여 가평에서 최초로 중등교육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가평중학원은 학원장 1명과 교사 5명, 그리고 초기 입학생 70명으로 시작하였다. 남여혼합 반으로 주·야간 2개반으로 편성 운영되었다. 1949년 9월 상면국민학교 부설 역촌분교장과 조종국민학교 부설 마일분교장을 신설하였으며, 1954년 7월 청평면에 사립청평중학원[지금의 청평중학교]가 6학급으로 인가를 밷아 설립되는 등 중등교육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현대 교육]

6·25전쟁 이후 가평군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직접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교육 역시 영향을 받게 된다. 군 소재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무기휴교 상태에 놓이게 되고, 교육시설 역시 크게 파괴되어 18개 학교 120교실 2,340평이 전소되거나 전파되었으며, 반소되거나 반파된 건물이 150평에 이르는 등 큰 피해를 겪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 후 수업이 재개되면서 교육시설의 복구와 함께 교육기회 보장을 위해 노력하여 교육시설의 복구와 더불어 1951년 9월 목동국민학교 부설 백둔분실을 11월 가평국민학교 부설 승안분교장을 설립하였다. 더불어 1953년 가평가이사중학교, 방일국민학교 부설 설악분교장을 설립하는 등 초중등교육기관을 확충하였다.

가평은 1954년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가평가이사고등학교와 청평공업고등학교가 이에 해당한다. 6·25전쟁 이후 가평교육은 교육자치 시대를 열게 되고 1956년 교육자치제의 교육구가 구성되면서 초대 교육감과 도 교육위원이 선출되게 된다. 의무교육을 완전실시하기 위하여 1부락 1교를 전제로 하여 분교장을 정규 국민학교로 승격시키고 그렇지 못한 부락에는 새로운 분교장을 증설하였다. 또한 1964년 처음으로 사립샛별유치원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가평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 새마을 교육, 과학기술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중학교무시험진학제도를 도입하여 무시험 추첨 배정하였고, 주민의 교육적 욕구 충족을 위하여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증설 또는 정비하였다.

1980년대 가평교육은 취학전 교육기관을 크게 확충되었고, 반면 취학아동의 감소로 초중등교육기관은 통폐합 또는 분교장으로 격하되었으며, 산업체 특별학급을 설치 운영하는 한편 사회교육적 기능을 강화하여 군립도서관을 설립하는 등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취학전 교육기관으로는 1981년 목동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을 시작으로 8개의 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이 설립되었으며, 1982년에는 3개, 1984년에는 1개의 병설 유치원이 설립되어 총 13개의 공립 병설유치원을 신설하였으며, 2개의 사립유치원과 5개의 새마을유아원을 설립하는 등 취학전 교육기관이 증설되었다. 반편 초등교육기관은 9개의 국민학교를 분교장으로 격하하였다. 1990년대에는 가평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각극학교에 과학실험실, 컴퓨터실, 시청각실, 음악실, 미술실. 어학실 등을 설치 운영하였고 1993년 전 학년으로 중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게 된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농현상으로 인해 폐교되는 초등학교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총 12개의 초등교육기관을 폐교하게 되었다. 2000년대 가평은 21세기 교육정책과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가평마장초등학교 병설유치원만 신설되고 초등교육기관은 계속하여 통폐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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