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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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영어음역 | Chungsin |
영어의미역 | Loyalist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주명준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연고를 두고 국가와 왕을 위해 충성을 바친 사람.
[개설]
성리학을 근본 학문으로 채택한 조선은 충효를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신하와 백성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전에 먼저 부모에 대한 효를 가르쳤는데, 효 사상이 외연을 넓히면 그것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귀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매년 방백과 수령에게 지시하여 효자와 열녀를 찾아 올리도록 했고, 이들에게는 정표를 주고 증직을 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국가가 왜란과 호란, 그리고 조선 말기의 일제 침탈을 맞아 위난에 처했을 때 고창 지역의 충의지사(忠義之士)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다. 또한 귀양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백성의 어려운 삶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인물 및 내용]
고려 시대 고창 지역 출신 중 충신으로 이름난 인물은 무장 사람 유녹숭(庾祿崇)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인물 조에 보면, “강직하여 일찍이 몸을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고, 비록 귀현(貴顯)의 처지가 되었으나 의복과 사는 집이 선비 시절과 한결 같았다.”고 유녹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숙종 때의 학자 유계(兪棨)가 엮은 『여사제강(麗史提綱)』의 인물 조에도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유학에 진취하여 벼슬을 지낸 40여 년 동안 공정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는 자기 마음을 가졌다.”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인물인 강민저(姜敏著)[1651~1705]는 1687년(숙종 13)인 37세 때 「정묘소(丁卯疏)」를 올려 민생 문제와 풍속 퇴폐에 대하여 대책을 논하였다. 43세 때인 1693년(숙종 19)에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었고, 1694년(숙종 20)에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다시 희빈으로 강하될 때 온건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남구만(南九萬)을 장희재(張希載), 민암(閔黯)과 함께 참해야 한다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으며, 당시 재상 남구만을 만나 8,000여 자로 된 글을 보내 힐책하였다. 45세 때인 1695년(숙종 21) 다시 「을해소(乙亥疏)」를 올렸다가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그로 인해 곧은 선비[直士]라는 칭호를 얻었다.
조흡(曺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오전(吳晪), 유철견(柳鐵堅)과 같이 의병을 모으고 병량(兵糧)을 거두었다. 김홍우(金弘宇)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우 김광우·김덕우와 더불어 고을 장정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경수·김재민 등과 창의하여 의병청을 설치한 다음 군량미 5백 석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에게 의탁하여 행재소에 보냈다. 이후로도 의병 8백 명을 규합하여 김극후에게 부탁하여 진주성에 보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두 아우와 함께 행재소로 가서 명나라 장수 해생(解生) 등과 합세, 8월 25일 소사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그의 아들 김여성, 김여진, 김여중 형제도 정유호란 때 크게 거의하였다.
안서순(安瑞順)은 1556년(명종 11) 조정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므로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말하고 끝으로 “간신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유관(柳瓘) 등 세 명을 억울하게 죽이고 송인수(宋麟壽)·임형수(任亨秀)를 죽인 것 역시 무죄하니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임금이 간신의 말에 따라 사람을 잘못 죽이니 근래에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윤원형이 안서순을 김인후(金麟厚)에게 연좌시켜 잡아들였으나 안서순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개진(開陳)하였다. 결국 안서순은 참형에 처해지고 집은 적몰되었다. 선조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노력으로 신원되었다.
서일남(徐馹男)은 정묘호란 때 유철견 등과 함께 의병과 군량을 모아 의청(義廳)으로 갔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곧 군대를 해산하고 무장에 은거하였다. 채홍국(蔡弘國)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방 출신 90여 명과 남당에 모여 단을 쌓고 창의하였다. 그 후 정유년인 1597년에 왜란이 재발하자 옛 동지를 모아 다시 창의하였고, 부안의 호벌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