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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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士林 |
영어음역 | Sarim |
영어의미역 | Neo-Confucian Literat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중기 공주 지역의 정치와 사상의 흐름을 주도한 양반 지식인 세력.
[개설]
공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호서 지방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비중이 더욱 심원하다. 공주 지역은 오랜 역사를 지낸 고도일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조선 초 이후로는 유서 깊은 유향으로서 청주, 충주 등과 더불어 호서 사림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계룡산과 금강을 배경으로 천험의 지형 조건을 지닌 공주 지역은 주위에 적지 않은 산·재·내를 거느리고 있으며, 관내에는 공산성을 비롯한 많은 산성과 누정이 있다. 이런 배경 하에 일찍부터 많은 토성과 거족들이 거주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사족의 성립]
공주 지역에서 유력한 인물을 배출시킨 가문은 매우 많으나 자료에 따라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읍지 인물조에는 전주이씨를 비롯해 부안임씨·김해김씨·여흥민씨·공산이씨 출신이 많으며, 문관과 무관 등의 현직에는 전주이씨·함양박씨·충주박씨·만경노씨·함평이씨·예안김씨·청주구씨·진주유씨 등의 이름이 현저하다.
인물조를 통해볼 때 공주의 많은 사족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가문은 전주이씨다. 전주이씨는 인물조뿐만 아니라 문관과 무관 등 모든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전주이씨 다음으로 부안임씨·김해김씨·공주이씨 등이 유력하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할 점은 상당수의 가문이 오랜 기반을 가진 전통의 명가라기보다는 근세에 들어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김해김씨·부안임씨·여흥민씨·해주오씨·전주최씨·전의이씨 등이 그 예로 이 가문들은 19세기 이후 번성한 것 같아 보인다. 반면에 전주이씨·공주이씨·예안김씨·만경노씨·단양우씨 등은 그 이전부터 세거하면서 문중 지위를 현양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관·무관·음관·수직·사마 등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에 견주어 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인물조에서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가문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난다. 다만, 전주이씨만은 예외로 전 부문에서 고루 인재를 배출하여 최고의 문중세를 자랑하고 있다.
전주이씨 외에 문신과 학자를 많이 낸 가문으로는 함양박씨와 충주박씨가 돋보이고, 그 다음으로는 공주이씨·부안임씨·만경노씨 등이 유력하며, 그 뒤를 함평이씨·예안김씨·파평윤씨·안동김씨·김해김씨·여흥민씨 등이 잇고 있다. 진주유씨·함평오씨·만경노씨 등도 무관을 많이 내었는데, 이들은 문반쪽도 적지 않아 문무를 겸전했던 가문으로 보고 있다.
여러 사족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도 다양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충절인이 다수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김종서와 정분 등이 유명하며, 그 밖에 충절인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는 공주이씨·만경노씨·부안임씨·전주이씨 등이 유력하다.
16세기 이후에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난정에 항거했던 서기 등 기호명현이, 양란을 전후해서는 영규 등 의병장과 조헌·영규 등을 따라 금산 싸움에 순절해 칠백의총에 묻힌 의사들이 돋보인다. 국란을 맞아 문중 차원에서 구국운동을 활발히 한 만경노씨 삼형제를 비롯한 진주유씨, 단양우씨 문중인들의 충절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 후기 사족의 동향]
17~18세기에는 성리철학이 원숙한 단계에 접어들면서 기호학맥에 관련된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박문수·오시수·이광좌 등 당대의 명신을 위시하여 이유태·권시·윤문거 등 기라성 같은 명현들이 일제히 출현하여 공주 사람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들을 배출한 경주이씨·안동권씨·파평윤씨 등과 전통의 명가인 전주이씨·함양박씨·한산이씨 등이 공주의 명족으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실천 유학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예(禮)’가 중시되고 문풍에 의한 교화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향촌에서는 충절과 효행, 열행을 권장하는 정려가 곳곳에 세워졌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공주 사림의 성향이다. 공주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학연은 대부분 이이로부터 비롯된 기호학맥에 속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호서 사림의 적통으로 자부하는 김장생-송시열의 노론계보다는 소론계 내지 기호남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비노론적 성향은 공주의 주요 특징으로서 주목되며, 이는 서원 건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주 지역에는 여러 서원과 사우가 세워졌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선조조의 충현서원, 인조조의 창강서원, 숙종조의 도산서원 등이다. 이 서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원간의 성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외견상 이 서원들은 모두 기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충현서원은 범서인계로 출발했으나 뒷날 노론계로 바뀌었고, 창강서원은 강한 소론계 성향을 띠고 있으며, 도산서원은 비노론적 남인계로 독자적 성향을 표방하였다.
이와 같은 서원간의 다른 성향은 호서 사림 내의 역학관계가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공주는 호서 지역의 중심지로서 호서 사림을 주도해왔고, 충현서원은 그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나 김장생의 후광을 업은 연산이 등장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비노론적 성향이 표출된 것이다. 호서 사림의 선구적 위상을 구축해온 공주로서는 새로 호서 사림의 거점으로 부상한 연산의 존재가 의식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창강서원이나 나아가 도산서원의 건립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원·사우의 건립과 사족의 동향]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정착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자들을 매년 뽑아 상을 주거나 상물을 주었다. 더욱 특이한 자는 정문(旌門)을 세워주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호역을 면제해주기도 했으며, 그 자손에게는 부역을 경감시켜 주었다.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포상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정려나 사우, 정려 등이 세워졌다. 이 가운데 정려는 충신·효자·열녀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고려까지 이어져서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전국적으로 상당수가 세워졌다.
이러한 것은 공천(公賤)·사천(私賤)에게는 신분의 상승을 가능하게 했으며, 사족에게는 가문의 명예였다. 그러나 사족의 경우는 단순한 도덕적·윤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와도 관련이 있어 그 지역 사족 세력의 추이와도 관련이 있다.
서원과 사우는 성현(聖賢)들과 선유(先儒)들의 향사를 받들고 유교 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과 윤리·도덕의 함양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즉, 서원과 사우는 특정 학파나 가문의 형세와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문도 혹은 문중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운영되는 사설(私設) 교육 기관이자 사당(祠堂)이었다.
서원이 처음 출현할 때는 배향 인물이 저명한 유학자 혹은 충신으로 대개 사림의 공감을 얻는 경우였으며, 그 기능도 평상시의 강학 활동에 머무는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그 사정은 달라졌다. 중앙과 지방의 관인과 사림이 서로 연결하여 서원의 설립과 사액의 취득을 둘러싸고 반대 세력과 대립 경쟁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 향촌 세력에 대한 연구에서 서원과 사우는 그 어느 유적보다도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서원과 사우는 지방 사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그 세력을 유지·강화시키기 위해 각각의 명분과 이해 관계를 반영한 증거이기 때문에 조선 후기 각 가문들의 시대 성격 및 사림들의 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은 충현서원이다. 충현서원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사우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중심으로 한 사족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1624년 충현서원에 사액이 내려진 것은 호서 지역의 대표적 서원이라는 점에도 그 이유가 있기는 하나, 인조 당시 변란의 발생과 이를 진압하는 데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관련 기록]
조선시대 공주목 지역의 사족들의 윤곽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여지도서(輿地圖書)』·『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공산지(公山誌)』 등을 통해 나타나는 성씨들로 파악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성으로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 외촌성으로 황(黃)·백(白)·하(河), 당 투화성(投化姓)으로 김(金)이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에는 토성으로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 촌성으로 황(黃)·백(白)·하(河), 투화성(投化姓)으로 김(金), 역성(驛姓)으로 현(玄)·최(崔)가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읍지』에는 토성으로 이(李)·정(鄭)·송(宋)·황(黃)·박(朴)·고(高)·임(任), 촌성으로 황(黃)·하(河)·백(白), 투화성으로 김(金), 역성으로 현(玄)·최(崔)가 기록되어 있다.
『공산지』에는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백(白)·하(河)·김(金)·현(玄)·최(崔)·임(林)·전(田)·주(朱)·유(兪)·서(徐)·노(盧)·한(韓)·윤(尹)·유(柳)·구(具)·진(陳)·오(吳)·허(許)·신(申)·권(權)·홍(洪)·심(沈)·신(愼)·변(卞)·경(慶)·성(成)·민(閔)·남(南)·나(羅)·지(池)·양(梁)·전(全)·조(趙)·어(魚)·변(邊)·채(蔡)·곽(郭)·목(睦)·강(姜)·장(張)·강(康)·유(劉)·배(裴)·손(孫)·맹(孟)·공(孔)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상에 나타난 가문과 실제 거주하는 가문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시기를 달리하여 발행된 읍지류의 인물조에 어떤 성씨가 많이 등재되었는지 시기별로 구분해서 출신 가문을 보면, 어떤 성씨가 공주의 유력한 성씨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 사림 인물]
공주 지역의 각종 읍지류에 가장 먼저 기록되는 인물로 이명덕(李明德)이 있다. 이명덕은 공주가 본관인 공주이씨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96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사헌부·춘추관·의정부·승정원 등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다. 공주 지역의 사림이 형성되는 시기에 주목되는 인물로 이목(李穆)이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유명한 학자로 고청(孤靑) 서기(徐起)를 들 수 있다. 이천서씨로 서경덕·이중호·이지함의 제자로 공부하였다. 이후 계룡산 등을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만 전념하였다. 죽을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공주의 사림 문화뿐만 아니라 호서 전체의 사림 문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유태(李惟泰)는 김장생과 김집에게 사사 받은 바 있는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명현이다. 송준길·송시열·윤선거·유계와 더불어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불린다. 이외에 암행어사로 명성을 쌓은 박문수(朴文秀), 공주목 유천에 살고 있던 백호(白湖) 윤휴(尹鑴)도 지성적인 용기를 보여준 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