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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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湖里 |
영어공식명칭 | Geumho-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금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삼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금호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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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리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금호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8.205㎢ |
가구수 | 186가구 |
인구[남/여] | 343명[남자 168명|여자 175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금호리(錦湖里)는 본래 ‘속금(束金)’이라 불렀다. 속금은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 어떤 학자가 마을 산세를 둘러본 후에 ‘금호’라 불러야 마을이 부흥할 것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금호(錦湖)’로 바꾸었다. 금호는 바다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여 비단 금(錦) 자와 물 호(湖) 자로 표기한 것이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해남군 화원방 지역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에 산이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이면 금호도에서 해남군 산이면 금호리로 개설되었다. 금호도(錦湖島)는 화원반도와 산이반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동여도(東輿島)』,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 『비변사인방안지도』에는 소금(蘇今) 또는 소금도(蘇今島), 『지방지도』[1872]에는 속금(束錦)이라고 표기하였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万分一地形圖)』[1912~1919]에는 금호도(錦湖島), 금호리(錦湖里),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도 금호리(錦湖里)라 표기하였다. 지명이 변화된 이유와, 섬과 마을 지명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지지자료』[1911]에 금호도(錦湖島)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볼 때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에 나오는 ‘속금(束錦)’에서 ‘금(錦)’를 취하여 금호도로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금호도는 본래 속금달도(束金獺島), 작도(鵲島), 신도(新島), 달도(獺島) 등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졌다. 속금달도와 작도는 주변의 갯벌이 간척되면서 금호도와 연결되었다. 현재는 연결된 섬을 일괄하여 금호도라고 칭한다.
현재 산두마을, 금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금호마을은 1636년경 밀양박씨 박종행(朴淙行)이 무안에서 이주하였고, 1660년경 김해김씨 김여복이 강진에서 이주하였으며, 1670년 인동장씨와 신안주씨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자연환경]
금호리가 있는 금호도는 해남반도에서 뻗은 산이반도의 북서쪽과 화원반도의 동쪽에 놓여 있다. 금성산(錦城山)[187.5m]을 중심으로 북쪽에 금호마을, 남쪽에 산두마을이 있다. 금호방조제 건설 사업으로 육지와 연륙되었고, 금호도 주변에 있던 속금달도, 작도 등의 작은 섬이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황]
금호리(錦湖里)는 북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영암호와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 구성리, 서쪽으로 화원면 영호리, 화원면 청룡리와 연결되어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8.205㎢이며, 금호리, 산두리의 2개 행정리에 186가구, 343명[남자 168명, 여자 1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 소득원은 쌀이고, 특작물은 배추, 양파, 깨를 재배하고 있다. 일부 농가에서는 축산과 어업, 그리고 요식업을 병행하고 있다. 산두마을에는 생산한 배추를 정리는 절임시설 공장이 2곳 있다. 지금도 갯벌에서 게, 바지락 등을 잡아 판매하고 있다. 금호보건진료소, 한국농어촌공사 영산강사업단 금호방조제관리소 등이 있다. 교통은 국가지원지방도 제49호선이 화원면과 산이면 구성리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뒤 금성산에는 금성산성(錦城山城) 터가 남아 있고, 김석형 효자각(金錫衡孝子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