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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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공교,공자교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진희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공자를 시조로 하고 있는 전통적인 학문 및 종교.
[개설]
함안은 지리상 경상도의 남북과 동서가 교류하는 지점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학문이 어우러진 곳이다. 1906년 함안군과 칠원현(漆原縣)이 합병되어 이루어진 고을로,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높은 학술적 성취를 이룬 곳이다.
[변천]
함안은 아라가야(阿羅伽耶)가 건국된 이후로 문화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조선 이전의 학문은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다만 가야 시대 목독(木牘)이 함안에서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가야 시대에 이미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함안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는 드러난 게 없다.
고려 말에 이르러 함안 이씨(咸安李氏) 집안의 충의공(忠毅公)이원(李源)과 그 아들 이방실(李芳實), 함안 조씨(咸安趙氏) 집안의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열(趙烈), 나주 오씨(羅州吳氏) 집안의 대사성(大司成) 오일덕(吳一德) 등이 문과에 올라 벼슬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저술이나 관계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학문적 업적을 고찰할 수가 없다. 또 함안 안인촌(安仁村)에 광주 안씨(廣州安氏)안수(安綏)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의 학문과 사환(仕宦)이 이어졌으나 역시 구체적인 학문 사항은 알 수가 없다.
경상남도 함안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이 시작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국가 교육 기관으로 1392년(태조 원년) 함안군 함안면 파수리에 함안 향교가 건립되었으며, 칠원에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역시 향교가 건립되어 공교육을 주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초 금은(琴隱)조열(趙悅)과 모은(茅隱)이오(李午)가 함안에 정착하고, 이후 각 성씨들이 속속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하지만 함안의 학문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한강(寒岡)정구(鄭逑)가 1586년(선조 19) 함안 군수로 부임한 일이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의 양 문하에 출입한 학자로서 창녕과 함안의 군수로 재직하면서 학문을 일으키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함안군 함안면 파수리에 있던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당시 함안의 대표적 학자인 죽유(竹牖)오운(吳澐)·황곡(篁谷)이칭(李偁)·황암(篁巖)박제인(朴齊仁) 등과 교유하며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함주지(咸州誌)』의 편찬은 당시 함안 지식인들에게 학문과 문화적 전통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침체되기 시작한 함안의 학문은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의 노력으로 여타 고을과 달리 급격한 쇠퇴를 막고 어느 정도 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간송조임도가 퇴계 학파와 남명 학파의 융합을 위해 평생 노력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 학파의 장점을 고루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큰 학자나 저명한 저술은 나오지 않았지만, 문중 별로 서원과 사우(祠宇) 건립을 통해 존현숭조(尊賢崇祖)와 강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간송 이후 이렇다 할 큰 학자를 배출하지 못한 함안 지역은 조선 후기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의 선비들이 향촌의 학자로 전락되었다. 학문도 이전보다 침체되어 이렇다 할 학문적 특색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제에 조선 말기 성재(性齋)허전(許傳)이 김해 부사로 부임하여 관아에서 강학을 열자, 배움을 갈망하던 함안의 선비들이 대거 몰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 함안 출신의 성재 문인만 90여 명에 이르고, 그 중에 문집(文集)을 남긴 문인이 27명이나 된다. 쇠미하던 함안의 학문은 성재로 말미암아 중흥을 이루게 되었다. 그때까지 미처 간행하지 못했던 조상의 문집이나 실기 서문을 받아 간행 반포하고, 재실이나 정자에 기문을 얻어 걸고, 비문을 받아 선조들의 학문과 덕행을 선양함으로써 묻혔던 함안의 학문이 단기간 내에 다시 융성하게 되었다.
1937년을 하한선으로 할 때 함안 지역 학자들이 남긴 문집은 약 200종에 이르고, 전저(專著)가 30여 종으로 파악되었다. 이 정도로 많은 저술이 나온 것은 함안이 학문의 고장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들 저술 가운데 아직 간행되어 공개되지 않은 것도 많고, 또 일부는 전란 등을 거치면서 흩어져 없어진 것도 적지 않다. 앞으로 함안 지역 이전 학자들의 문집과 저술을 빠짐없이 발굴 간행하여, 함안의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밝혀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가야 시대 고분과 토기 등에 치우쳐, 함안은 유학이 낙후된 지역으로 인식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다. 앞으로 그 실상을 올바르게 밝혀, 그 어느 지역보다 학문이 앞섰던 고장임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현황]
조선 중기 이후 함안 지역에는 함안 향교와 칠원 향교가 국가 교육 기관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조선 중기 함안 군수로 부임한 한강정구는 1595년(선조 28) 기존 함안군 함안면 파수리에 있던 함안 향교를 봉성리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함안 지역 학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칠원 향교 역시 1623년(인조 1)에 중건되고, 1760년(영조 36)에 현감 임우춘(林遇春)이 칠원면 용산리 현재 위치로 이건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조선 후기 함안 지역에서는 학문을 다시 일으키고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각 문중별로 많은 서원들을 건립하였다. 어계(漁溪)조려(趙旅)를 중심으로 하여 생육신을 모신 서산 서원(西山書院), 모은(茅隱)이오(李午)를 향사한 인구 서원(仁衢書院), 충열공(忠烈公)이방실(李芳實)을 봉안한 남강 서원(南岡書院),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을 모신 덕연 서원(德淵書院), 한강(寒岡)정구(鄭逑)·모촌(茅村)이정(李瀞)·황암(篁巖)박제인(朴齊仁)·황곡(篁谷)이칭(李偁)을 향사한 도림 서원(道林書院), 취우정(聚友亭)안관(安灌)을 향사한 신암 서원(新巖書院), 모헌(茅軒)안민(安慜)·죽계(竹溪)안희(安憙)·장암(壯庵)안신갑(安信甲)을 향사한 두릉 서원(杜陵書院), 광릉자(廣陵子)안택(安宅)·무진정(無盡亭)조삼(趙參)·동천(桐川)박오(朴旿)·매죽헌(梅竹軒)이명호(李明怙)·삼열당(三悅堂)이경번(李景蕃)·만묵당(晩黙堂)이경무(李景茂)를 향사한 여양 서원(廬陽書院), 갈촌(葛村)이숙(李潚)·참의 조익도(趙益道)·인원군(仁原君) 이휴복(李休復)·무숙공(武肅公)박진영(朴震英)을 향사한 도계 서원(道溪書院), 오졸재(迃拙齋)박한주(朴漢柱)·대소헌(大笑軒)조종도(趙宗道)를 모신 덕암 서원(德巖書院),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를 모신 송정 서원(松亭書院), 모암(茅庵)박희삼(朴希參)·송암(松嵓)박제현(朴齊賢)·황암박제인을 향사한 평천 서원(坪川書院), 국암(菊菴)나익남(羅翼南)을 향사한 도산 서원(道山書院), 일성재(一誠齋)배여경(裵汝慶)·낙계(樂溪)조영득(趙靈得)·이봉(夷峰)황후간(黃後幹)·의사 조익성(趙益誠)을 향사한 도암 서원(道巖書院), 경재(敬齋) 주각(周珏)·국담(菊潭)주재성(周宰成)·감은재(感恩齋)주도복(周道復) 등을 향사한 기양 서원(沂陽書院) 등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남강 서원·서산 서원·신암 서원·두릉 서원·덕연 서원 등 극히 일부만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