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13 |
---|---|
한자 | 一千八百七十二年地方圖龍安縣圖 |
영어공식명칭 | 1872. Local Map Yonganhyeondo |
이칭/별칭 | 1872년 군현지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기송 |
[정의]
1872년 제작된 전국 군현 지도 중에서 전라도 용안현을 그린 지도.
[개설]
『1872년 지방도(一千八百七十二年地方圖)』 「용안현도(龍安縣圖)」 는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인 1872년 3월~6월에 걸쳐 각 군현으로부터 자체적으로 완성시킨 지도를 모아 도별로 수합한 것 중의 전라북도 용안현 지도이다. 『1872년 지방도』는 모두 461장에 이른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구성은 경기도 40장, 충청도 52장, 전라도 84장, 경상도 106장, 강원도 28장, 황해도 42장, 평안도 85장, 함경도 24장으로 되어 있다. 「용안현도」는 전라도 84장 중 하나이다. 용안현은 오늘날의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해당한다.
[제작 발급 경위]
『1872년 지방도』는 전국 지방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이 기획, 저작한 지도이다. 『1872년 지방도』에는 군, 현뿐 아니라 진영, 산성, 목장, 군사, 시설 등을 채색으로 그린 지도가 포함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지도들은 군현 지도뿐만 아니라 영(營)·진보(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수합된 지방 지도로는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형태]
『1872년 지방도』는 회화식 첩장이다. 각 첩장의 크기는 가로 35㎝, 세로 24㎝이다.
[구성/내용]
원래 읍치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용안읍성은 둘레가 4,240척(尺)[1,284m]이고 성 안에 우물이 5개, 연못이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 지방도』「용안현도」 제작 당시에는 대부분 붕괴되어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고을의 하천변으로는 많은 제언이 축조되어 있고, 다른 고을의 지도와는 달리 보(洑)가 직접 그려져 있기도 하다.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堤)는 고여 있는 물이고, 보는 흐르는 물을 막아 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고을 북쪽 난포(蘭浦)에는 세창(稅倉)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초기에 득성창(得成倉)[그 이전에는 덕성창(德成倉)이라 부름]이 있었던 곳으로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겨졌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여기로 옮겨졌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성당창(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군산창(群山倉)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는 여기에서 거두어 서울로 조운하였다. 현재 익산시 용안면의 부곡천 하류에 ‘난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1872년 지방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작되어 수합되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제작 원칙 아래 체계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에 들어 있는 정보량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 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