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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762
한자 孝子
영어음역 hyoja
영어의미역 dutiful s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김정호

[정의]

진도군 일대의 지역에서 역대로 부모를 섬김에 있어 효를 극진히 한 자식.

[개설]

유교를 이념으로 성립한 조선왕조는 지배체제와 사회질서의 요체를 예(禮)에 두었다. 예 중에서도 특히 자연적인 혈연관계에서의 효제(孝悌)를 기본 덕목으로 삼아 인위적인 정치체제에 중첩시킴으로서 치국(治國)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에 있어 효는 가정 질서의 기본이면서 사회 질서의 기둥이었고, 나아가 국가 유지의 근본이었다. 따라서 효는 비단 부모에게의 효도뿐만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까지 연결되는 덕목이었다.

[효의 장려와 포상]

조선왕조는 가정, 사회,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효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권장하여 포상하였다. 이 포상에 대한 규정은 조선 초기에 제정된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장권(獎勸) 항목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효우(孝友)와 절의가 있는 효자·효손·절부, 국가를 위해 사망한 자의 자손과 목족(睦族), 구환(救患)자는 해마다 세초(歲初)에 본조(本曹)[예조]에서 녹계(錄啓)하여 장려하고 권장한다. 이들에게는 관직이나 혹은 물건을 상으로 주되 특이한 자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제한다.

-효열(孝烈)이 정문·복호에 합당한 자는 여러 지방에서 뽑아 임금에게 알리고 매 식년 초에 본조의 당상관 이상의 정승들이 모여 심사해 조정에 이송하고 이를 별단으로 다시 임금께 보고 한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겸외 사족의 가장이나 노부, 교수, 훈도로 하여금 부녀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만일 그 대의를 통하여 조행(操行)이 특이한 자는 관찰사가 시상한다.

조선왕조의 유교적 기반을 다진 세종은 효열(孝烈) 장려책의 일환으로 1431년(세종 13) 충신·효자·열부에 관한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삼강행실도』를 널리 반포하여 백성 교화에 힘썼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장려책을 국가가 주도하였으나, 점차 지방 향교 등을 중심으로 유림이 앞장서 시행하거나 각 지역의 읍지류에 그 행실을 기록했다.

[진도의 효열(孝烈)]

조선왕조는 삼강을 권장하고 장려하였지만, 포상 결정에는 엄격하였다. 영조 때인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진도군 관련 기록에 향리로 정문(旌門)을 받은 사람은 박대형 뿐이었다. 그러나 1791년의 『진도군읍지』에는 강천복(姜天福), 그의 처 천소사(千召史), 전일월(田日月), 김응확의 처 이(李)씨 등 효자 1명, 효부·열녀 3명이 추가되었다.

1906년 사찬 기록인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는 기준이 모호한 인사들의 충신, 효자, 열녀들이 등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23년에 106명의 진도 군내 인사들이 강헌계(綱獻契)를 조직해 강헌비와 비각을 세웠고 1931년 9월에는 향교 임원들이 앞장서 삼강비(三綱碑)를 세웠다. 이때 삼강비에는 효자 21명, 열녀 23명, 충신 7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진도에 절의나 효행, 열부비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국권을 잃은 1910년 이후이다. 1911년 세운 진도군 군내면의 곽윤배의 처 밀양박씨 절의비를 시작으로 광복되기 직전인 1944년까지 21기의 열행비·효자비 등이 세워졌다.

이는 표창이나 선양사업이 자유화된 데 따른 시대 변화가 작용하였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국권 상실에 따른 삼강 정신의 회복을 통해 전통을 보존하려는 시대적 요구도 작용하고 있었다.

1976년 『진도군지』에 나와 있는 효자의 명단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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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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