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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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買召忽縣 |
이칭/별칭 | 온조,『삼국사기』,『삼국유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집필자 | 이세호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를 포함한 인천 지역의 고구려 때 지명.
[개설]
통일 신라 한주 소성현(邵城縣)의 고구려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미추(弥鄒, 彌鄒) 혹은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나온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비류는 미추홀로 들어가 살았으며,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위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홀이 인주(仁州)라 기록되어 있는데, 인주는 인천의 고려 시대 지명이다. 따라서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소성현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으며, 매소(買召)는 미추(弥鄒)라고도 했다고 하였다.
[내용]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면, 인천이 백제에 속해 있던 시대의 지명은 미추홀이다. 475년(장수왕 63)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 정책으로 이 지역을 고구려가 점령한 이후, 고구려에 속해 있던 시대의 지명은 매소홀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현이라 불리다가, 통일 신라 시대 경덕왕 때인 757년에 소성현으로 개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고려 현종(顯宗) 때,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숙종(肅宗)의 모후인 인예 태후(仁睿太后)의 내향(內鄕)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다시 인종(仁宗)의 모후인 문경 태후(文敬太后)의 내향이므로 인주(仁州)로 고치고 지주사(知州使)로 삼았으며, 공양왕(恭讓王)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태조(太祖)가 다시 인주라고 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 인천군으로 고쳤다. 1459년(세조 5)에 소헌 왕후(昭憲王后)로 인하여 도호부(都護府)로 높였다. 1895년에 23부제 실시로 인천부가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